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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We will take care of you anyway!”

 

스판서 교회와 처음 만남은 그야말로 감동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 시작인 그 만남을 사탄이 방해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먼저 변호사를 선임해야 했다. 미국 교회는 한 번도 외국인을 고용해 보지 않았기에 비자가 필요하다는 것 이상 더 자세한 것을 몰랐다. 변호사도 내게 선임하라고 일임했다, 모든 비용은 교회에서 제공했지만. 멤피스의 처치 어브 크라이스트 멤버인 에릭에게 연락했다. 이전에 H1b 비자가 거절된 후에 어필을 해야 하나를 알아보다가 알게 된 형제다. 처음 그의 사무실에 갔을 때 대학 캠퍼스 선교사셨던 글렌을 만났는데 그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에릭은 얼마가 드는 지도 말해주지 않고 내가 원하면 무료로 담당해 주겠다고 선뜻 후원의 뜻을 비쳤다. 다만 자기는 종교비자는 다루어 보지 않아서 좀 알아보면서 해야 한다는 것과 한달에 천 건 정도의 일을 하다보니 자기가 바쁜 것을 감안해야 한다면서. 스판서 교회에 부담도 덜어줄 겸 에릭에게 부탁을 했다. 

 

서류를 준비하던 어느 날 교회에서 이메일이 왔다. 어떻게 전도를 할 건지 계획을 말해달하는 것이었다. 그 시점에서의 그런 질문이 불쾌하게 받아들여졌다. 일도 시작하기 전인데 숫자부터 생각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서 어떻게 전도를 해야 하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터라 오해를 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 교회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성과주의에 빠져있는 교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해가 더 커져갔다. 급기야 내 오해가 사실로 느끼면서 이메일에 답장을 했다: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기회가 되는 대로 한국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길 일이라는 것뿐이다. 나는 그 이상을 개런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 이상을 원하는 게 있다면 이쯤에서 스폰서 얘기는 없었던 일로 하자.”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는 비자가 안 되는 한이 있어도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서 내 대답은 확고했다. 

 

이메일을 보내고 몇 일 동안 연락이 없었다. ‘결국 안 되는 것이었구나’ 하고 실망하고 서류 준비도 멈췄다. 그러다 마이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직 만나보지 않았던 때라 전화받기도 불편했다. 어쨌든 내 뜻을 분명히 전하기는 해야했기에 전화를 받았다. 인사말 뒤에 마이크의 농담조의 첫마디가 아직도 귀에 선하다: “What’s wrong with you?” 나는 다시 내 생각을 설명했다. 조용한 목소리로 마이크는 조근조근 자신들의 선교에 대한 생각을 설명했다. 내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런 이메일을 보냈냐고 물었다. 마이크는 단지 내가 한인 선교에 대해 어떤 계획이나 아이디어들을 갖고 있는지를 물은 것이었지 어떻게 숫자를 늘릴 건지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몹시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다. 스키죠프레니아(Schizophrenia)와 같은 현상이었던 것이다—수입없이 8년을 살다 보니 생긴 예민함 때문이기도 했고. 내가 그렇게 해석을 한 것이지 상대방이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오해를 사과하는 내게 마이크는 계속 서류를 준비하라고 말했다. 내 그런 잘못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회를 주는 것에 감사했다. 전화를 끊고 이메일을 다시 읽어보니 마이크의 말이 맞았다. 그제서야 내 자신의 오해에 한숨이 나왔다. 하마터면 그렇게 어렵게 얻은 기회를 얼토당토 않은 내 예민함 때문에 사탄에게 속아 놓칠 뻔했던 것이다.

 

마이크로부터 교회로 한 번 올 수 있냐는 연락이 왔다. 당연히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디서 묵을 거냐고 물었다. 괜찮다면 마이크의 집에서 머물러도 된다고 했다. 우리가 아쉽고 황송한 입장에서 잠자리까지 신세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도라빌 근처의 싼 호텔을 그것도 호텔스닷컴에 쌓인 리워드 포인트로 예약했다. 7년 반의 유학생 생활로 몸에 베어서 하루 한두끼 정도는 호텔에서 컵라면을 끓여먹는 등 식비도 아낄 것이었다. 몇 일 후에 마이크가 다시 연락을 해서 오면 저녁 예배에 설교를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그 교회와의 첫만남의 날이 되었다.

 

주일 오전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건물이 상당히 컸다. 노아의 방주가 산 중턱에 걸쳐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마이크는 미국 맥도날드 농장의 농부같이 푸근한 인상을 가진 덩치 큰 사람이었다. 반면 와이프 즈닌(Janine)은 인자하고 편안한 미소를 가진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즈닌이 준비한 점심을 그들 집에 가서 먹고 장로들과 식탁에 둘러 앉아 미팅을 했다. 월급을 정할 때였다. 금액을 제시하며 그 정도면 생활하는 데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우리 가족의 한달 실생활비와 거의 같은 금액이었다. 큰 두 아들들이 코끼리 같이 먹다 보니 식비가 만만치 않았었다. 렌트비와 식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니 렌트비만 당시 우리가 내던 1200불 정도의 집을 구할 수 있으면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재무담당자인 조지와 마이크가 갸우뚱했다. 그 가격의 렌트를 여기서 구하기 쉽지 않다는 말이었다. 그 때 짐 장로가 나섰다. 그는 장로 중 연장자이기도 했지만 카리스마가 대단하다. 키는 185정도 되는데 몸집도 어마어마하다. 목소리는 우렁우렁한 천둥소리 같다. 마이크와 조지의 의견을 듣고 있더니 말했다: “That’s okay. We will take care of you anyway.” 마이크와 조지를 번갈아 보면서 “Oaky?” 하자 둘 다 “Okay” 하며 넘어갔다. 그렇게 고용계약서에 사인이 되었다. 짐이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비자를 승인받고 이곳으로 이사를 올 때까지 분명히 알 수 없었다. 방 세개짜리 1200불짜리 렌트를 구할 수 없었다. 그 때 교회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타운 홈을 갑자기 산 것이다. 그리고, 전기세 등 모든 것을 포함해서 딱 그 만큼을 지불하고 사택으로 살게 해 주었던 것이다.

 

저녁 예배에서 설교를 하고 미시시피로 출발하기 전이었다. 조지가 차종이 뭐냐고 물었다. '뭐 그런 걸 묻지?' 하고 생각했다. 잠시 후 자기 사무실에 갔다와서 봉투를 주었다. 설교 사례와 여행경비라고 했다. 빠듯한 학생 살림인지라 얼마라도 고마운 판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꺼내 보더니 깜짝 놀라며 말한다. “이거 뭐야?” 750불 짜리 수표였다. 나중에 잘 못 준 것 아니냐고 물었는데, 여관비, 밥값, 기름값은 물론 자동차 감가상각비까지 포함한 금액이란다. '아하, 그래서 차종을 물어본 것이었구나" 하며 그분들의 세심함과 정직함에 놀랐다.  

 

교회 분들의 따뜻함과 친절함 그리고 정직함까지 모든 것이 은혜롭고 감동스러웠다. 이 감동은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까도까도 끝이 없는 양파처럼 그분들을 알면 알 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 교회를 성과주의에 물든 속물교회로 오해해서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박찰 뻔했으니 나의 경솔함과 사탄의 교묘함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한편 안도와 한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의 눈물이 난다.

 

금주의 설교 보기/듣기: 참된 믿음, 고난을 무릅쓰는 믿음 (야고보서 5장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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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ary Hill church of Christ

 

본래는 지금의 교회가 아니라 갈보리 힐 교회에서 일을 할 줄 알았었다. 그 교회에서 신청한 H비자가 거절되지 않았거나, 그 교회가 501C3인증을 IRS로부터 조금만 더 일찍 발급받았더라면 그 교회에서 일을 하고 있었을 게다. 지금의 교회가 제출할 종교비자 신청서에 증빙자료들을 준비해서 보내기 직전에 나는 갈보리 힐 교회 Larry장로와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만일 이 교회에서 기다리라고 하면 이 서류를 보내지 않겠다”고. 아무리 내 입장이 다급하지만, 그 교회에 먼저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래리는 그럴 수 없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최선을 다했으나 안 되었으니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지 보자.” 그렇게 미팅을 마치려는데, “그런데” 하며 래리가 말했다, “501C3가 어제 발급되었다.” 래리가 맞았던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나와 우리 가족을 아틀란타로 옮기고자 하셨던 것 같다. 불과 한달만 일찍 그 서류가 나왔어도 얘기는 많이 달라졌을 텐데 그 전날에서야 나온 걸 보면 말이다. 갈보리 힐 교회와 스폰서 문제는 그렇게 정리되었지만 그후로도 이곳으로 이사올 때까지 총6년 동안의 그 교회와의 인연은 우리 가족의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옥스포드 미시시피 동쪽 외곽 지역 한 구석에 세련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그 교회 건물이 있다. 이 교회는 내가 합류하기 6년 정도 전에 그 도시에 있는 두어 가정이 시작한 교회다. 그 중 한 가정이 래리의 가정이었다. 그 후 2년 쯤 후에 스티브가 프리쳐로 합류하면서 현재의 모양의 교회가 되었다.얼마 뒤 래리와 스티브가 장로로 임명되어 교회의 수적 영적 성장을 이끌었다. 

 

내가 그 교회를 만난 과정은 좀 희안(uncanny)하다. 마틴 테네시에 살면서 첫번째 학위를 한 학기 남겨놓고 나는 미국 처치 어브 크라이스트의 또 다른 신학대학을 다녀서 균형을 잡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근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생각했고, 생각하면 실행에 옮기는 성격인지라 그렇게 했다. 새로운 신학대학원은 멤피스 테네시에 있었다. 멤피스에도 한국인 커뮤니티가 있으므로 거기서 한인 사역을 하며 학교를 다닐 수도 있었겠지만, 학교에서 한시간 20분 가량 떨어진 옥스포드로 살 곳을 정했다. 미시시피 주립대학이 있어 유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옥스포드로 이사간 날은 090909 즉, 2009년 9월 9일이었다. 그해 12월에 첫 학위를 마치고도 트랜스퍼 일정에 문제가 생겨서 그 다음 봄학기까지 2시간 20분씩을 운전해서 이전의 대학원을 다녀야 했다. 

 

옥스포드로 이사를 했을 때 마틴 교회의 실비아라는 자매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옥스포드에 래리라는 자기 친척이 있으니 꼭 만나보라고 했다. 학교 다니랴 새로운 곳에 적응하랴 바빠서 신경을 쓰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옥스포드에서는 1970년대부터 한국인 미니스트리를 지원해오던 옥스포드 처치 어브 크라이스트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스레 그 교회에 합류했다. 오랫동안 한국인 미니스터가 없었기에 자연스레 내가 한인 유학생 미니스트리를 담담하게 되었다. 그 교회는 나를 미니스터로 인정해 주고 장학금 지원도 하고 한 달에 한번 설교도 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교회의 형제인 짐과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에 다른 교회의 한 형제와 만나서 성경공부를 한다고 했다. 마침 수요일에는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어서 영어연습도 하고 성경도 좀 더 공부할 겸 같이 하기로 했다. 옥스포드로 이사간 지 6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다.  

 

래리는 키가 2미터 가까이 되는 장신이었다. 농구선수로 아틀란타 머서 대학을 장학생으로 다니고, 내쉬빌에 있는 벤더빌트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치고 세계에서 이름난 미시시피 주립대학의 생약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보수적인 테네시 시골의 프리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성경을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혼자서 성경공부를 무지무지 열심히 하는 ‘성경전문가’였다. 첫 수요일 점심 성경공부를 위해 짐의 오피스에 가서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는데 실비아가 꼭 만나보라고 편지까지 했던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물론 래리도 실비아로부터 나에 대해 듣고 내가 찾아오기를 기다렸단다 (미국 형제들의 배려는 참 아름답다. 이사와서 안정되는 데 6개월 정도는 걸리니 그 후에 연락이 오겠지 … 그 후에도 안 오면 자기가 찾아 보리라 생각하고 있었단다). 그렇게 나보다 15살 정도 많지만 래리는 나의 둘도 없는 믿음의 형제가 되었고, 둘도 없는 영혼의 친구가 되었다. 이곳으로 이사오기 전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많이 배웠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 고맙다.” 거기에 대해 그가 한 말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 “너와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고, 너로부터 많이 배웠다. 고맙다.”  

 

그렇게 래리를 만난 지 1년 정도 되었을 때 처음 그가 장로로 있는 갈보리 힐 교회에 초대를 받았다. 우리 가족들은 65명 정도 되는 작은 그 교회가 정말 맘에 들었다. 300명이 모여서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옥스포드 교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래서 그 해 10월 경에 한인 유학생 미니스트리를 그만 두고 그 교회로 옮겼다. 옮긴 후 2-3주 정도 지나 다른 장로인 스티브와 점심을 같이 했는데, 스티브가 한 말은 지금도 내 가슴을 뜨겁게 ㅎ한다: “민구, 우리는 너와 평생을 같이 하고 싶다. 너만 원한다면 ….” 그와 나는 거의 매주 한 번 만나 주로 치킨으로 점심을 같이 했다 (서던 프리쳐는 치킨을 많이 먹는다는 서던 농담이 있다). 법적으로 고용된 것은 아니지만 그 교회에서 파트타임 프리쳐로 일을 했다. 같은 프리처로서 우리는 설교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나는 학교에서 배운 것을 그와 나누었고, 그는 그의 25년 경험에서 배운 것을 나와 나누어 주었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동역이었던지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 진다. 

 

그렇게 인연이 된 갈보리 힐 교회는 우리의 인생 이야기에서 한 챕터를 차지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만 6년이 넘는 기간 동안, 즉, 현재의 교회에서 비자를 신청한 후 비자를 기다리는 2년 반동안도 변함없이 그 교회는 우리 가족을 신실하게 후원해 주었고, 그 교회의 멤버들은 우리 가족의 친형제와 친자매와 같았다. Ms. Annie, Roy and Susie, Ronny and Kathy, Steve and Gay, Larry and Pat, Terry and Wanda ….  

 

하나님은 우리 가족이 7년 동안 잠시 거쳐 지나갈 옥스포드에도 미리 천사들을 준비해 두시고 또 내가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기회들을 예비해 두셨던 것 같다. 정말 하나님의 인도는 mysterious하다. (다음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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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설교: "끝까지 참으라" 야고보서 5장 7-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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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하시는 하나님”

 

이 쯤이, 그 교회가 어떻게 나를 스판서하게 되었는가를 얘기할 순서인 것 같다. 이 일은 생각할 수록 은혜롭다. 왜냐하면 이 일을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예비의 역사를 볼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 그의 진리의 교회를 통해서 이루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목도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신학교육을 모두 마치고 졸업하기 얼마 전에 H1-B비자를 신청했지만 거절되었었다. 비자를 스판서 해줄 뿐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평생을 같이 일하자고 했던 미시시피 옥스포드의 갈보리 힐 처치 어브 크라이스트(church of Christ, 이하 교회)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당장 없었다. 남은 옵션은 종교비자를 신청하는 것인데, 그 교회는 그럴 수 있는 법적인 요건을 당시 갖추고 있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것은 세무서(IRS)로부터 받은 비영리법인 인증서(501C3)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사실을 알자마자 신청했었지만, 당시 1년 가까이 감감무소식이었다 (그것은 현재 스판서를 하고 있는 교회가 나타난 후인 2014년 초에야 발급되었다). 그렇게 스판서할 교회를 못찾아 안타까워 하고 있을 때에 한국인 미니스트리에 관심이 있을 만한 10여 교회에 무작위로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보냈던 것이다. 2013년 9월이었다.   

   

그 편지들 중 하나를 받았을 때 그 교회는 3년 째 한가지 기도제목이 있었다. 바로 한국인 목회자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교회에서 일할 수 있는 한국인 목회자를 만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Churches of Christ는 비교단 독립교회들이다. 각 교회들이 장로들의 리더쉽 아래 성경만을 기준으로 운영된다. 바로 이웃 동네에 교회가 있어도 교회 운영에 관한 한 서로 아무런 관여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사람으로 치면 친형제간 못지 않게 서로 신뢰한다. 그런 처치 어브 크라이스트 교인들이 힘을 합해 만든 대학들은 미국에 10개도 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 내가 목회학 석사를 마친 프리드하드만은 현재까지도 가장 많은 교회들로부터 가장 인정받고 존중받는 학교다. 많은 학교들이 적잖이 자유주의와 세상적 아이디어들을 성경적인 것처럼 가르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경적이고 영적인 데 중심을 두는 현재의 교회에서 그 학교에서 공부를 한 사람을 선호했을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내가 그 학교에 가기 전부터 졸업할 때까지 약 5년간 그 학교에서 성경을 전공한 한국 유학생들은 모두 4명이었다 (그뒤로는 정확히 모르지만 거의 없었던 것같다). 3명은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현실적으로 사실상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3년째 한국인 미니스터를 만나기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단지, 도라빌에 한국인들이 좀 사는 것 같아서 그들을 선교하기 위해 시작한 게 아니다. 

 

그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야기는 그 때로부터 십이삼 여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교회의 멤버였던 자매가 있었다. 그녀는 비즈니스를 하면서 점점 교회와 거기가 멀어졌고 급기야 교회에 나오지 않기에 이르렀다. 1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뒤 그녀가 다시 교회에 나타났다. 당연히 나이는 더 들었다. 그런데 한가지 더 있었는데 그것은 암환자가 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담임 목사이자 장로의 한 사람인 마이크와 성경공부를 원했다. 마이크! 마이크는 그런 크리스챤이다. 영적인 갈망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천리라도 한 달음에 달려가 성경을 같이 공부하고 영적으로 섬길 그런 하나님이 내리신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는 종이다. 마이크와의 성경공부를 통해서 그녀가 영적으로 회복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영적으로 회복된 그녀는 세례도 다시 받았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악하도다”라고 하신 것과 같이 영은 회복되었으나 몸에 이미 난 암이라는 상처는 되돌릴 수 없었다. 주님의 교회에서의 3년 정도의 행복한 삶을 마칠 때가 되었다. 그녀는 교회로부터 멀어지면서까지 일을 해서 모은 재산을 교회에 헌금했다. 한 가지 부탁과 함께—“한국인 미니스트리를 위해서 써달라.”    

 

왜 그분이 한국인 미니스트리를 해 주기를 바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분이 도네이션한 펀드가 없었다면, 재정이 그리 크지 않은 이 교회에서 풀타임 한국인 목회자를 채용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교회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 교회는 재정적으로 “주님을 위해 일하니 조금만 받고 봉사해달라”거나 “신분문제를 해결해 줄 테니 조금만 받고 일해라”는 식으로 하지 않았다. 영주권 신청은 장로님들이 나보다 더 서두르신다. 월급은 우리 가족의 생활비를 기준으로 책정해서 줄 뿐 아니라, 연말에는 연말휴가를 보낼 수 있을 정도의 보너스도 준다. 지난 여름에 한웅이가 대학에 들어갈 때는 학비도 상당히 지원해 주었다. 주 40시간을 넘어서 일하는 듯하면 가정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은근한 ‘경고’를 주는 그런 분들이다. 

 

어떤 분들은 “미국교회니까 그렇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은 미국 교회라고 다 그렇지 않다. 성경적인 교회가 아닌 한 그렇게 하지 않는다. 디모데전서 3장15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진리의 기둥이요 터다. 세상이 갖지 못한 진리가 있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곳이라는 의미다. 이 교회가 (나에게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이렇게 하는 것은 진리를 지켜 행하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지켜 행하지 않는 교회였다면? 그 자매가 다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마이크와 성경공부를 통해서 영적으로 회복되지도 못했을 것이고, 자신이 애써 모은 재산을 도네이션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도네이션했다 하더라도 그 돈을 그 사람이 원한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썼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이 교회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다른 곳으로 가 있었을 게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이 교회가 우리 가족의 비자를 스판서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진리의 기둥이요 터로 예비하셨기 때문이다. 어디 이런 교회가 하루 아침에 세워질 수 있는 것이던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가 미국에 오기 전부터,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이 지어지기 전부터 예비하신 것이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반추4 예비하시는 하나님.pdf

 

금주의 설교: "끝까지 참으라" 야고보서 5장 7-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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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1 09:53

3호 --가만히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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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으라”

 

미국에 온 뒤 빈번히 나를 괴롭히는 상상이 있었다. 부모를 잃은 한웅이와 한빛이가 보인다. 한빛이는 아직 유치원생 정도고 한웅이는 초등학교 2-3학년 쯤이다. 한웅이가 한빛이를 데리고 다니며 돌본다. 한웅이는 어른스럽게 상황을 이겨나가고 얌전한 한빛이는 형을 믿고 졸래 졸래 따라다닌다. 어떤 때는 다리 밑 같은 곳에서 배고프고 추운 밤을 맞기도 한다. … 이런 상상이 나도 모르게 백일몽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나면 가슴이 미어졌다. 그때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아이들이 너무도 가엾고 또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태해지던 마음도 얼어붙듯 싹 사라지고 다시 죽으라 공부와 일을 했다. 

 

신청했던 H1B비자가 거절된 후 심리적 압박이 절정에 다다랐던 것 같다. 21년 살면서 부부싸움을 너댓 번밖에 하지 않았는데, 그 때에 한 번 했던 기억이 난다. 두려운 마음을 둘 다 애써 참고 지내던 어느 날 미래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다투고 말았다. 어려움 그 자체보다도 그것이 주는 심리적 압박이 사람에게 더 큰 데미지를 준다. 정신적인 고통에 비하면 육체적인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 압박은 더해 왔다.    

 

한웅이는 나면서부터 생각이 바르다. 지금껏 단 한번도 누구에게 화를 낸 적이 없다. 누구에 대해 안좋은 말을 한 적도 없다. 그리고 부모에게 대든 적은 말할 것도 없고 말대꾸조차 한 적이 없다. 공부를 더 깊이 하고 싶다며 중3 때 시작한 풋볼과 보이스카웃을 고1때 스스로 그만 둔 뒤부터, 리서치를 하듯이 공부를 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에 만족하지 않고 더 깊이 알고 싶어했다. 고3을 마치고 4학년이 되기 전에 이사하지 않았었더라면 졸업생대표(Valedictorian)가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아이였다. 

한빛이는 한웅이와 성격이 다르다.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어디에서도 눈에 띄거나 튀지 않았다. 너무나도 착해서 우리가족 넷 중에 가장 천사같다. 누구든 마음이나 몸이 아픈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여리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 양보하고도 전혀 아까움을 느끼지 않는 아이다. 물론 공부도 열심이다—지금껏 단 한번도 A를 놓친 적이 없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오히려, 다른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것조차 해주지 못한 것들이 더 많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등등의 핑계로 ….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비자가 거절되어 생기는 문제들에 비하면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기치 않게 한국으로 갑자기 돌아가게 되면 그 아이들의 교육이 완전히 꼬이게 될 것이었다. 내게 그런 상상이 자꾸 나타났던 것도 그런 염려 때문이었던 게 아닌가 싶다. 사실 나와 집사람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스스로 선택해서가 아니라, 아빠와 엄마 때문에 오게 된 우리 아이들에게 나타날 것이다. 내가 공부하는 동안 많은 것을 희생해준 아이들에게 그런 extra의 고통을 주는 것은 … 상상만으로도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더 처절하게 비자 스폰서를 찾았다. 마지막으로 10여 군데의 교회에 레주메를 보낸후에도 계속해서 수소문을 했다. 그러던 10월 중순 경에 어느 미국 교회에서 연락을 받았다. 내 레주메를 받았다면서 이런 저런 질문을 하고 나서 검토하고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짧은 통화였다. 한군데서라도 연락 온 것이 기적같았지만, 그냥 의례적인 응답이 아닐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더 컸다. 한국인을, 심지어 2세조차도 미국 교회에서 청빙한 경우는 그 때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그후 4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별다른 소식없이 12월이 되었다. 비자를 신청했다가 거절당한 Calvary Hill Church of Christ의 장로들이 불렀다. 종교비자 스폰서를 하려면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하는 비영리기관 인증을 IRS에 신청한 지 1년이 되는 상황이었는데 감감무소식이었기에 혹시 다른 가능성도 찾아 보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유일한 한국인 Church of Christ가 있는 뉴욕을 향하게 되었다. 12월 23일에 출발해서 24일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맨하탄의 크리스마스 이브를 구경했다. 표지 사진은 그해 록펠러 센터 앞에 설치된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다. 뉴욕의 그 교회는 나를 청빙해 줄 의사는 커녕 진리에 대한 열정도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나와야 했다.

 

마지막 가능성마저 사라진 후 마지막 기회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3박을 하며 여유있게 여행삼아 미시시피로 돌아왔다. 블루 리지 산맥을 달리는 경관 좋은 파크웨이를 타고 내려오다 버지니아 Roanoke에서 그해 마지막 해가 지는 것을 보고 50불짜리 모텔에 들어갔다. 저녁 7시 경, 낯선 곳에서 전화가 왔다. 10월 중순 경에 전화했던 그 교회사람이었다. 그가 말했다: “우리와 일하고 싶다면 우리가 너를 청빙하겠다.” 믿기지 않기도 하고 또 확인하고 싶어서 다시 물었다. “What?” 장로이자 담임 목사인 마이크는 또박 또박 다시 말해 주었다. 내가 그렇게 찾을 때는 나타나지 않던 스폰서가 그렇게 하늘에서 뚝 떨어졌던 것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계속 말씀하고 계셨던 것 같다, “가만히 서서 내가 베푸는 구원을 보라”고. 홍해를 가르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듯이 말이다 (출애굽기14:13). 

다음 날 새벽에 다시 블루 리지 파크웨이에 다시 올라 2014년의 첫 해돋이를 보았다. 마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듯이 그 아침은 상쾌했다. 집사람과 나는 미시시피까지 내려가는 내내 입이 마르게 하나님을 찬양했고, 신이 나서 그 동안 서로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걱정과 근심은 물론 믿음과 기도들도 털어 놓고 나누었다. 얼마나 좋으신 하나님인가. 그러니 하나님을 믿고 아무 걱정도 하지 않았어도 되었던 것을 …. 믿음이 부족한 자들이여.

 

그러나, 스폰서를 보내 주신 것은 그 긴 기다림 동안에 베푸신 은혜의 처음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믿음의 여행은 다음 주에도 계속 된다.     

 

반추3 “가만 있으라”.pdf

 

 

금주의 설교: 교만의 극치, 겸손의 극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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