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호--미숙아였던 한빛이

by 장민구 posted Mar 0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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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추13.jpg부모가 어려움을 겪을 때 아이들도 직간접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한 환경이 아이들의 성장에 주는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크다. 그 영향이란 마치 새하얀 광목 천에 먹물을 엎지른 듯이 그 영혼에 그대로 스며드는 것 같다. 아이들의 마음이 여리고 순수하기 때문일 게다. 우리 가족 중에 가장 어리고 가장 여리고 가장 착하고 가장 순수한 사람 한빛이도 그렇게 우리의 기다림의 과정이 주는 무게의 영향을 받았다.

 

한빛이는 지금은 우리집에서 가장 키도 크고 작년 다이어트를 하기 전에는 몸무게도 가장 많이 나갔었지만, 사실은 미숙아로 태어났다. 내가 처음 비즈니스 세계에 발을 디디고 정신없이 여기 저기 불려 다니며 술에 쩔어 살던 2001년 10월 6일 새벽에 한빛이가 태어났다. 예정일보다 3주 전이어서 이웃에 살던 동업자 친구와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들어가서 넋을 놓고 잠을 자고 있던 새벽 2시 경에 아내에게 진통이 왔다. 금새 양수가 비치고 상황이 급박했는데, 아직 술이 깨지 않아서 운전을 할 수가 없었다. 동업자 친구도 취해서 쓸모가 없었고, 결국 10여 분 거리에 사는 다른 친구에게 부탁을 해서 일단 다니던 산부인과로 갔다. 의사가 나와서 빨리 인큐베이터 시설이 준비되어 있는 종합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처음으로 119구급차를 타 보게 되었다. 그렇게 성남 위생병원에 새벽 4시쯤 도착했고, 아직 술이 덜 깨 얼떨떨한 상태에서 한빛이가 잘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2.7 몇 킬로그램 … 다행히 인큐베이터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한빛이는 말문이 늦게 터졌다. 미국에 오던 해 5살이 될 때까지도 한빛이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아내는 병원에 가봐와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지만 나는 좀 늦는 것 뿐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한빛이는 유난히 나를 좋아했다. 내 배위에 올라 앉아 노는 것을 좋아하고, 잠잘 때는 내 옆에 누워 내가 배를 토닥여 주는 것도 좋아했다. 미국에 오기 전후까지 나와 입맞춤을 자주했을 정도였다. 엄마는 더럽다고 질색을 하지만 한빛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유치원도 잘 다니지 못했다. 놀이방에 처음 가는 날 집단 생활에 트라우마가 생긴 것같았다. 그날 집사람은 한웅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느라고 집에 없어서 내가 대신 보내야 했다. 처음 가방을 매는 한빛이는 잔뜩 신이 났다. 그런데, 정작 놀이방 버스가 오자 겁을 내며 울기 시작했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을 때, 놀이방 선생님이 한빛이를 불끈 들어 허리춤에 차더니 “애들은 다 그래요. ㅎㅎ 금방 괜찮아 질 거에요” 하며 자지러지게 우는 한빛이를 납치하듯이 차에 태우고 가버렸다. 영 찜찜했는데, 결국 한빛이는 그 하루도 채우지 못하고 아내가 데려와야 했다. 그 뒤로 한빛이는 미국에 올 때까지 유치원에 많이 가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유치원에 등록을 해 놓고 한빛이가 가고 싶은 날만 가도록 했다. 한달에 두어번 가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같다. 한빛이가 학교에는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까지 들 정도였다.

 

미국에 와서 한달 뒤에 한빛이는 킨더가든에 입학했다. 아내는 한빛이를 보며 몰래 걱정의 눈물을 훔치곤 했다. 어린 것이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이 내 마음도 무겁게 했다. 말을 잘 못하니, 학교에서 무슨 일이, 무슨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심지어 학교를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학교에 가지 않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킨더가든에 가서도 말을 잘 못 했다, 한국말도, 영어도. 내 생각에 한빛이가 말을 자유롭게 하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였던 것 같다. 말은 했지만 여전히 수줍어하고 소극적인 아이였다.

 

한빛이의 영웅은 형 한웅이다. 한빛이는 형아의 그늘을 벗어나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형아가 없으면 안 되었다. 집에서 놀 때도 형아의 그림자 안에 있다. “형아 형아” 부르며 쫓아다니고 재잘거리고 또 따라했다. 한웅이가 레고를 가지고 놀면 한빛이도 레고를 가지고 놀고, 한웅이가 자동차를 가지고 놀면 한빛이도 그러고, 한웅이가 그림을 그리면 한빛이도 하고, 한웅이가 먹으면 한빛이도 먹었다. 한웅이는 한빛이의 영웅이기도 하고 선생이기도 했다. 다행히 한웅이는 설명해 주기를 좋아하고 한빛이가 그렇게 따라다니고 붙어있어도 짜증을 내는 법이 없었다. 한웅이는 한빛이의 수호천사처럼 한빛이를 좋아하고 귀여워했다. 지금도 한빛이는 스타일 등에 대해 엄마 아빠가 하는 충고는 듣지 않아도 한웅이의 말은 듣는다. 예를들어 작년에 의사가 살을 빼야 한다고 한 날부터 다이어트를 시작했는데, 살인적이었다. 정말 물과 야채 그리고 과일 밖에는 아무것도 안 먹었다. 걱정이 되어 나와 아내는 뭘 좀 먹으면서 운동하면서 해야 한다고 했지만, 알아서 하겠다면서 막무가네였다. 그때 그나마 조금씩 먹게 된 것이 한웅이가 조금은 먹어야 한다고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웅이는 늘 한빛이 걱정이다, “그렇게 여려서 이 힘든 세상을 어떻게 살래?” 하며 말이다. 

 

한빛이는 본래도 말이 많이 없었지만, 사춘기가 되면서 더욱 더 말이 없어졌다. 특히 작년부터 한웅이가 집을 떠난 후로 한빛이는 그나마 말이 더 없어졌다. 학교에서는 친한 친구들도 제법 있단다. 또 친구들과는 전화로 같이 스터디 그룹도 하고 때로는 페리미터 몰 주변을 걷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여자친구도 사귀었었다. 한달 만에 끝났지만. 요즘 여자애들이 한빛이같은 쑥맥을 좋아할 리가 없다. 한웅이도 3명의 여자애들이 왔다가 재미없다며 떠나갔는데, 한빛이는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한빛이에게는 두명의 영혼의 친구가 있다. 월트와 루크다. 우리가 미시시피 옥스포드에 이사갔을 때 한빛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었는데, 그 때 교회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처음부터 죽고 못살았다. 거의 2주 건너 한 번씩 돌아가며 슬립오버를 하고 여름에는 같이 수영장도 가고, 각자 집에 있을 때는 온라인 게임으로 주말 새벽까지 수다를 떨었다. 제작년 아틀란타로 이사오던 날 한빛이는 말이 없었다. 아마 너무도 힘들었을 게다. 그 좋은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방학 후 2-3주 동안 거의 매일 같이 신나게 놀았다. 월트와 루크도 한빛이를 보내고 싶지 않았고 한빛이도 그들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 2-3주 동안 14살 어린 아이들의 천진한 얼굴들에 서운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마지막으로 월트 집에서 한빛이를 데려 오는 날, 한빛이는 “이제 이사가도 되겠어요” 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곤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빛이에게 이 친구들은 영혼의 친구들이다. 루크는 옥스포드에 유지 집안의 장손이다. 월트는 한빛이 만큼 공부를 잘하는 똑똑한 아이다. 아틀란타로 이사 온 후로 해마다 만나고 있다. 지난 여름에는 루크가 래프팅 트립에 초대해서 갔었고, 월트는 식스프랙스 패밀리 트립에 초대해서 같이 갔었다. 이국땅에서 외로운 한빛이와 우정을 나누는 월트와 루크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아마 하나님께서 그 아이들에게도 한빛이와의 우정을 통해서 무언가 큰 축복을 주시리라고 믿는다. 

 

미숙아로 태어났던 한빛이는 결코 약한 아이가 아니었다. 작년 여름방학 두달 만에 70파운드를 뺀것이 그것을 말해 줬다. 거의 매일 새벽 2-3시까지 공부를 하는 지금도 몸무게를 조절하기 위해 아침과 점심을 야채와 프로틴 믹스로 하고 저녁 한끼만 집에서 밥을 먹는다. 정말 독한 녀석이다. AP클래스들을 계속 듣지만 단 한 번도 숙제를 안해가거나 밀린 적이 없다. 어려운 것이 있으면 나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해도 좀처럼 않는다. 엊그제도 AP화학 문제 때문에 몇시간을 씨름을 하길래, “도와줄까?” 했더니,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해결해야 이해할 수 있어요” 했다. 다음날 아침 학교에 태워다 주면서 물어봤더니 결국 해결했단다. 이렇게 한빛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날, 그 주에 할 일을 마친다. 그리고, 월트 루크와 온라인 게임도 하고, 이곳 친구들과 주말에는 같이 걷기도 한다. 지난 주부터는 토요일에 나와 함께 축구 모임에도 나가기 시작했다. 

 

아틀란타에 온 후 어느날 가정예배에서 나는 비자 때문에 어떤 어려움을 겪었었는지를 아이들에게 말해 주면서, 이렇게 비자가 승인되어 아틀란타로 잡을 얻어 오게 된 것이 우리 가족에서는 얼마나 큰 하나님의 선물인지를 얘기해 주었다. 그때 갑자가 한빛이가 오열을 터뜨렸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을 때 왜 그러냐고 물었다. 220파운드의 등치를 여전히 씰룩씰룩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아빠는 그렇게 힘드신 줄도 모르고 저는 친구들하고 헤어지기 싫어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우리가 겪는 이 힘든 과정에 직간접으로 받는 영향이 한빛이를 이렇게 연단해 나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짠하면서도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금주의 설교(클릭): "땅따먹기 같은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