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호--벼랑의 끝에서 하나님을 믿다

by 장민구 posted Mar 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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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D, notice of intent of denial (거절의사통지)! 종교비자를 신청한 후 거의 스물세 달을 기다린 후에 받은 것이다. 한웅이는 주니어였고, 한빛이는 중3이었다. 아이들의 앞날을 생각하면 눈앞이 컴컴했다. 마음 속에 밀려오는 좌절감은 마치 스폰지로 된 내 몸이 물을 가득 머금은 것처럼 자꾸 나를 주저 앉히려만 했다. 마음은 푸석푸석해서 웃음도 사라지고 아무런 의욕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두 달 안에 보충 증거를 제시해 보라고 했고, 아직은 1월이어서 대학원 졸업까지는 4개월 정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실날같은 희망을 붙잡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다고, 그 실날 같은 희망을 짓뭉개는 말들이 날아 들어왔다. 믿음이란 참 희안하다. 그런 와중에도 그것은 고개를 더욱 빳빳이 처들었다.

 

먼저, 변호사 에릭에게 전화를 해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친구 에릭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고, 해 봐도 소용없을 것이란 말을 했다. 몇 가닥의 실날 중에서 한 가닥이 잘려 나갔다. 에릭의 태도조차 실망스러웠다. 아무리 수임료를 받지 않고 호의로 해주고 있었지만 내 사정을 아는 사람이 너무 한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용이 없더라도,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서만이라도 보충 증거와 함께 재고를 호소하는 어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와 아내 그리고 한빛이도 어디서 살든 그렇게 큰 타격이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당장 고3인 한웅이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몇 가닥 되지 않는 희망의 실날 중에 또 하나가 곧 끊어졌다. 종교비자를 스판서 해준 지금의 교회에서 매월 1500불씩 보내던 장학금을 당장 끊겠다는 것이었다. 말이 장학금이지, 생활비의 2/5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비자 신청 후 그 때까지 지원해준 것만으로도 물론 감지덕지한 일이었지만 만일 그것이 끊어진다면 당장 곤란했기에 여간 심기가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손으로 정성스럽게 편지를 썼다.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지원을 계속해 달라고. 마지 못한 듯 한 달 더 즉, 3월까지만 지원해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들에게 보낸 그 편지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끝나기 전에는 끝난 것이 아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안 될 일도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음을 믿으시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간들이 지나고, 3월이 되었을 때 두어 가닥 남은 희망의 실날 중에 또 하나가 끊어졌다. 혹시 최종적으로 종교비자가 거절되는 것에 대비해서 그 대학 영문학과에 박사과정을 지원해 두었었는데 합격이 안 된 것이다. 미국인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윌리암 포크너의 고향에 있는 그 대학 영문학은 미국에서도 꽤 알아 준다. 문학에서 발전시켜 온 해석방법론을 배워 성경해석론으로 승화시키겨는 생각으로 지원을 했었던 것인데, 영문학에 대한 전혀 기초 학문이 되어 있지 않았었던 터라, 입학허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것에 걸었던 기대도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마지막 세 개 남았다. 그 중 하나는 종교비자 어필이 받아들여지는 것이고, 그중 다른 하나는 혹시나 하고 다른 잡을 지원해 둔 것이었다. 나중에 한 편의 글을 통해서 소개하려고 계획하고 있지만, 거야오(Ge-Yao Liu)라는 나의 절친이 그 대학의 유학생들을 관리하는 책임자였는데, 그가 정보를 줘서 그 대학 잡에 지원을 해 둔 상태였다. 그런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서류접수 기간이 끝난지 한참이 지났지만, 서류 접수를 받았다는 연락조차도 없었고 아무런 후속 조치도 또한 없었다. 거야오가 알아보니 실제로 채용할 의사가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라고 했다. 결국 거기에 기대를 걸 수 없다는 말이었다. 오늘까지도 그 자리에 사람을 충원했다는 말도 또 아직 심사 중이라는 말도 없다.

 

모든 것이 안 될 때, 학교를 졸업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OPT (Optional Practical Training)를 쓸 수 있다고 생각도 했었다. 흔히 대학이나 대학원을 마친 유학생들이 인턴쉽을 하는 기간이다. 보통 1년이고 의대 등 몇몇 전공들은 2년 반이다. 이 기간 동안 잡을 알아볼 수 있다. 나도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학교에 알아보니 이미 한 번 써먹었기 때문에 두번째는 6개월 밖에 없단다. 그걸로는 신분을 연장하는 데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다. 학생비자를 계속 연장하려고 해도, 미국은 입학지원할 수 있는 시기가 정해져 있어 1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6개월이라도 벌어줄 수 있었으니, 반 가닥 정도의 희망이었다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기대를 걸고 우리 가족의 운명을 맡길 수는 없었다는 점에서 보면 그것은 희망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한가지, 종교비자 어필이 승인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무원이 자신이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란다. 그리고 2년 정도가 걸린다. 물론 그 2년 동안은 미국에 합법적으로 체류를 할 수 없다. 결국 마지막 남은 옵션은 정말 가능성이 없는 것인 셈이었다. 

 

일단 무엇보다 가족들의 마음을 다져야 했다. 어떤 일이 생기든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하고 순종적인 마음을 되새기도록 했다. 가정예배를 통해서 인생이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그렇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이들과 아내의 믿음을 다지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나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가장 큰 문제는 한웅이였다. 한웅이에게는 미국 외 해외 대학 지원도 고려해 보라고 권유했다. 한웅이가 독일어에 유난히 신경을 쓴 것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혹시 다른 나라로 유학을 가야 하는 상황에 대비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의 대학에 지원을 하는 것도 생각을 해 보도록 권유했고 캐나다, 영국 및 유럽 대학 등 영어로 공부를 할 수 있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곳들을 생각해 보라고도 했다. 한웅이는 침착했다. 비자 문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정확히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영리한 아이니까 아빠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한웅이에게서 아무런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가족들은 더 자주 대화를 나누고 친밀하게 지냈다. 우리가 왜 미국까지 왔는가—아빠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살기 위해—를 다시 상기시키고 처음에 가졌던 그 마음을 변치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자주 얘기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당시에 내 설교나 성경 강의들이 거의 모두 ‘끝까지’ 견뎌야 한다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설교자는 결국 자신에게 설교를 한다.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메세지를 설교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메세지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상황이라 신경이 날카로와지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걸로 서로 의견 충돌이 생기거나 감정 대립이 생길 수 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비자가 승인되지 않았다는 사실 보다 더 비참한 것이다. 그런 뜻에서 어려울 때일 수록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야 한다는 것을 자주 얘기했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보다 더 자주 서로 허그를 해 주었다. 나는 한웅이를 안아줄 때마다 가슴이 메어와 아팠다. 허그하면서 내가 멈칫멈칫 할 때, 한웅이는 크고 탄탄한 손으로 등을 툭툭 두드려 주곤 했다. 

 

우리 가족은 “완전히 끝이 나기 전에는 끝이 난게 아니다”는 것을 믿었다.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결코 포기하지도 그 상황에 지지도 않았다. 가족끼리 더 자주 영화도 보러 다니고 외식도 하고 즐겁게 지냈다. 나도 학교에서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내 자신을 잃지 않고 항상 미소짓고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행동했다. 아내도 그랬다. 언제나처럼 미소 가득히 사람들을 대하고, 언제나 우리 자신의 처지보다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더 생각했다. 서늘한 기운을 마음 깊은 곳에 숨기고 우리 가족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지냈다. 우리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심각한 믿음의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모든 기대가 불가능으로 판명나고 가장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단 한 가지 기대만이 남아 있을 때, 바로 그때가 믿음이 일할 때다. 특히 그것이 본래의 뜻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하나님의 부르심 대로 살기 위해서는 일단 종교비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옵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세밀한 소리는 늘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느니라” (마태복음 19:26).

 

그 즈음 어느 날, 친구 거야오가 걱정을 해 주며, “만일 대학에 잡이 생기면 종교비자를 취소하겠느냐”고 물었다. 주저 없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포기 안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벼랑의 끝까지 몰렸지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지도, 하나님께 드린 약속을 버리지도 않았다.   

 

금주의 설교: 복음, 고난 후의 영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