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호--여정의 시작

by 장민구 posted May 13, 201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봉림산.jpg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 주시겠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큼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회사에 가도 특별히 할 일도 없고 해서 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매일 회사에 나가긴 했다. 관리자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저으기 괴로웠다. LG쪽 일을 하려고 했던 시설을 다 철거하고 삼성에 그리고 1차벤더에 사죄하고 다시 일을 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고 지그가 다시 들어오기를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불합리한 것은, 삼성은 협력업체에 인력이 확보되어 있지 않으면 일거리를 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수십 명의 사람을 대기시켜 놓고 몇 주, 몇 달을 기다려야 일을 줄까 말까 했다. 중소기업과 그 기업인의 목을 조르는 짓인데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버티지 못하면 영영 끝장이다. 열받아서 들이받아도 끝장이다. 끝까지 참고 “네 네 …” 하며 삼성 쪽의 ‘선처’만 기다려야 했다. 삼성의 ‘선처’가 있어도 1차벤더 실무자들의 눈밖에 난 괘씸죄가 씻어져야 한다. 갑질을 하느라 눈도 마주치지 않는 그들 앞에 늘 조아리고 언제든지 부르면 쪼르르 달려갈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다시 일거리를 줄까 말까 했다. 나는 지금도 왠만해서는 삼성 물건에 맘이 가지 않는다. 지금은 많이 변했으면 좋았으련만, 요즘 삼성관련 뉴스들을 보면 부정적이다.

 

내가 빛좋은 개살구 같았다. 창원에서 가장 좋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한국에서 최상급의 자가용을 타고 다녔지만, 사업때문에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은행 빚이 2억 7천만원이었다. 집 모기지까지 합하면, 약 4억 5천이었다. 거기다가 그 조아리고 기다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나갈 수록 손해는 커져만 같다. 한달에 거의 1억 정도씩. 생산하는 것은 없이 종업원들만 유지하고 있어야 하니 운영비와 인건비가 100% 손해로 되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직원들이 회사가 정상화될 때까지 스스로 월급 20%씩을 반납하겠다고 나섰다. 딱 잘라 거절했다. 망해도 사장 혼자 망해야지 나와 회사를 믿고 열심히 일해 준 직원들의 가정에까지 손해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정도 돈은 당시에 있어나 없느나 큰 차이가 없었다. 그동안 벌어놓은 것과 여기저기 신용으로 빌린 돈으로 겨우 겨우 버틸 수 있었다. 일없는 회사에 출근해서 잠깐 청소하고 밥만 먹고 시간을 보내다가 월급을 받아가던 직원들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렇게라도 같이 버텨 준 직원들은 나에게 정말 없어서는 안 되는 사업의 동반자와 같이 되었다. 지금도 그분들 대부분의 인상이 기억난다. 

 

건강은 호전이 없었다. 스님으로부터 침도 맞았고 전문 마사지 치료사로 부터 마사지도 받았지만 소용없었다. 진화스님은 처가집이 지어준 당시 전주에 있던 영월암이라는 절의 주지였는데 5백여 년 전부터 절에 내려오는 침과 방약의 비방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경희대 등 한의대 교수들이 간혹 와서 그 책을 잠깐 그 자리에서 보고 가는 것을 몇 번 보았고, 진화 스님과 술자리를 같이 할 정도로 친했던 나에게는 그 비방을 설명해 주기도 했었다. 그분이 침을 놓아 많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주는 것을 보았던 그때가 어쩌면 내 침술 인생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미국에 온 후 2011년부터 가정의학을 목적으로 독학으로 침을 배워 지금은 좀 놓을 줄 알게 되었는데, 침을 생각할 때마다 그 스님이 생각난다. 그 스님으로부터 침을 자주 맞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수억 원의 빚, 악화되는 건강, 그리고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업. 모든 것이 비관적이었다.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아무에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 조용히 버티며 속을 까맣게 태우고 있었다. 그날 아침도, 가족들의 눈만 아니면 그냥 집에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길을 나섰다. 창원대학교 근처를 지나가면서 마음을 딴 데 두기 위해, 라디오를 켰다. 집사람이 자주 듣던 창원 극동방송이 나왔다. 무슨 방송이든 어차피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놔뒀다. 바로 그 때 마침 아나운서인지 어떤 프로그램의 진행자인지 바로 그 말을 했다.

 

“당신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 주시겠습니까? … 돈입니까? … 재산입니까? …. 그런 것들은 다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

 

멍하니 운전을 하던 내 머리를 해머로 치듯이 그 말이 마음에 꽂혔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업도 망해가고, 건강도 안 좋아지고 있으니 …  아이들과 아내에게 빚더미만 남겨주게 생겼는데, 예수에 대한 믿음이라도, 나는 가질 수 없어도, 우리 아이들에게라도 가질 수 있게 해 주자. 그러면, 그 어려운 삶을 이겨낼 수 있을지 어찌 알겠는가?’ 정말 천재일우를 한 것처럼 눈이 확 뜨였다. 희망이 생긴 것이다.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이 앞으로 아이들의 인생에 무엇을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몰랐지만 나는 라디오 진행자가 전한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회사 사장실 책꽂이에는 성경이 꽂혀 있었다. 여섯살 위 쌍둥이 중 작은 누나가 준 NIV-개역한글 병행성경이었다. 누나가 언젠가 읽으라고 내가 대학 다닐 때 선물로 준 것이었다. 모두 9권의 작은 책으로 제본되어 있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읽기 좋았다. 한영 병행성경이라 한국말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는 영어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날부터 사무실에서 할 일이 생겼다. 성경을 읽는 것이다. 많이는 읽지 못했지만, 성경을 읽고 일찍 집에 돌아가서 거실 가운데에 작은 밥상을 놓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가정 예배 혹은 성경공부를 했다. 아내가 아는 찬송을 몇 곡 같이 부르고 내가 성경을 읽으며 생각한 것을 아이들에게 얘기해 주었다. 한웅이 한빛이는 그 시간을 좋아했다. 한웅이는 찬송가도 잘했다. 한빛이는 형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소절 끝에 한 두 음절을 따라하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즐겁고 흥미로웠다. 매일 매일 했다. 아이들도 좋아하고 집사람도 좋아하고, 나도 좋았다. 회사에 가서 할 일이 생겨서 좋았고, 성경을 읽다 보니 재미도 있었다. 또 대학 한 3학년 때까지 읽기라도 했던 영어를 다시 하게 된 것도 좋았다.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것이 중2때부터 하나의 꿈이었었기 때문이다. 

 

그 때는 그게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인지 몰랐다. 교회에 정기적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신앙생활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안다.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역사가 무엇인지도 알 것같다. 하나님은 내 상황을 통해 내 마음을 열고, 극동방송 라디오 진행자의 입을 통해서 내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에 귀기울이게 하시고, 나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믿음이 무엇인지 알아서 믿은 것이 아니었다. 믿음은 복음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가르치는 대로 인생을 바꾸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할 수 있어서 믿은 것도 아니었다. 그 때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지 못했어도, 나의 그 받아들이는 믿음의 마음을 통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요한복음7:39; 갈라디아서5:5), 아직 미숙하지만 순수하게 순종하려는 마음을 통해서 성령께서 도우시기 (사도행전5:32)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 한웅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얼마 후 김해 장유로 이사가서 학예 발표회가 있어서 한웅이네 교실에 처음 가봤다. 거기서 아내와 나는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교실 뒤에 각자의 장래 희망을 사진과 함께 장식해 놓은 게 있었는데, 한웅이의 꿈은 목사님이었다. 처음 안 사실이었다. 내가 주님의 종이 되겠다고 마음 먹기 이미 3년 정도 전에 한웅이가 그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성경전공으로 1년 대학공부를 한 지금까지도 한웅이의 꿈은 그대로다. 어쩌면, 한웅이가 그렇게 좋아했던 그 가정예배를 통해서 그 꿈이 생긴 것은 아니었을까? 나중에 한웅이에 대해 좀 더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족의 크리스챤으로서의 삶의 여정을 이렇게 시작하셨다.

 

금주의 설교: 삶의 기초--말씀을 듣고 행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