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강-마태복음 5:4 Blessed are those who mourn ...

by 장민구 posted Feb 22, 202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5:4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문장도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for 연결된 개의 문장으로 구성된 문장이다. Blessed are those who mourn역시 be동사의 주어와 보어의 위치를 바꾸어 blessed 강조하고 있다. 주어는 이번에는 those라는 지시대명사인데 that 복수다. 여기서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Who mourn 하나의 완전한 문장이다. , 하나의 기본문장이다. 따라서 문장은 blessed are those라는 기본문장과 who mourn이라는 기본문이 연결되어 만들어진 문장이다. 그러면 접속사는 무엇인가? 문장에서 접속사의 역할을 것은 관계대명사. 

관계대명사는 문장과 문장을 연결해 주는 것은 접속사와 같은데, 특이한 점은 관계대명사 문장은 대부분 꾸며주는 역할을 한다. 이는 마치 형용사가 동사를 꾸며 주는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문장에서도 those라는 불특정한 지시대명사를 꾸며주는 역할을 한다. , 그들은 그들인데, 애통해 하는 그들이다. 이렇게 관계대명사는, 특수한 용법도 있지만, 보통은 문장의 앞에 나온 단어를 꾸며주는 역할을 한다. 관계대명사가 꾸며주는 앞에 나온 단어를 선행사라고 한다. 관계대명사는 선행사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사람이면 who (주어를 대신할 )/whom (목적어를 대신할 ), 사람 이외의 것은 which (주격 목적격 같음) 사용한다. That 선행사가 사람일 때나 사람 이외의 것일 모두 사용할 있지만 문맥을 파악해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

관계대명사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본문에서와 같이 문장 속에 앞서 나온 어떤 단어를 설명함으로써 해당 범위를 한정하거나, 단어의 특성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I love a woman이라는 말을 하면 여러 가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여기에 관계대명사를 붙여 의미를 한정해서, I love a woman, who married me twenty six years ago라고 하면 사람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오해를 막을 있다. 하나의 예를 들면, Do you know the man, who is speaking now? 누구를 말하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지금 말하고 있는이라는 설명을 더해 경우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예수님이 천명하실까? 

3절에서와 같은 논리적 구조로 본다면, 애통해야 복을 받는 것이다. , 복을 받으려면 애통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애통하는 것은 무엇이고 애통해야만 복을 받을까를 생각해 보자. 애통한다는 것은 누군가 죽었을 곡을 정도로 슬퍼하는 것이다. 죽음과 같은 슬픈 일이 일어났음이 전제되어 있다. 누가 죽은 것일까? 바로 나다. 하나님 앞에 내가 죽은 것과 같이 애통하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우리는 모두 죄로 인해 하나님과 동떨어져 있었다. 이제 하나님을 알고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오려면 (3),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던 죄값을 치러야 한다. 죄값은 죽음이다. 물론, 영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 영적으로 죄인이었던 내가 죽어야 한다. 그러나, 애통하는 구체적인 이유를 보자면, 죄값으로 인한 영적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뻐할 일이다 (누가복음 15:7, 10). 애통하는 것은 그렇게 죄로 인해 살아도 것이 아니고 죽은 자의 삶을 살았던 과거의 자신의 무지함과 하나님에 대한 거역을 애통하는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애통해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죄로 물들어 살았던 나의 과거의 죄과를 멀리 떠나보내며 과거의 죄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애통하는 것이다. 이렇게 과거의 죄에 대해 애통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없다 (야고보서 4:9, 10). 이렇듯 죄로 인해 애통해 하는 심령을 갖지 않고서는, 우리의 죄값을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은혜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어느 누구도 받아 누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모를 때에 대해 애통하여 크리스챤, 주님의 제자가 후에는 애통해 하지 않아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 간단히 말해서,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부족함과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무리 죄를 멀리하고 의를 위하여 살려고 해도 죄를 안짓고 수없는 존재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안에서 말씀으로 살았지만, 뒤돌아보면 너무나 부족함이 많고 심지어 지은 죄가 많다. 이런 자신을, 그리고 그런 부좀함과 죄를 어찌 애통해 하지 않겠는가? 크리스챤이 되기 전에 지은 죄들에 대해 애통한 심령을 가졌었다 하더라도, 후의 자신의 부족함과 죄에 대해 애통해 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는다. 이것을 가장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성전 마당의 바리새인과 세리다 (누가복음 18 9-14).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 눈에 뜨이게 따로 서서 기도하면서 자신의 의로움을 하나님 앞에 내세운다 (11-12). 그러나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애통한다 (13). 둘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하셨다 (14). 

교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 보다 못한 삶을 살아,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말하기를 자신은 이미 사함을 받았으니, 자신에게는 이상 죄가 없다고 한다. 죄가 없으니 애통하는 심령을 가지고 회개를 하겠는가?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알아야 것은 그들은 하나님과 교회의 얼굴에 먹칠을 아니라,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1 10절은,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신의 부족함과 죄에 대해 항상 애통하는 심령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의 마음가짐과 태도이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위안해 주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