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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을 이렇게 배웠다.

장민구 지음

 

제1장   처절한 사랑의 시작

 

아크로폴리스의 절규

“민주주의가 뭔데? 민주주의가 뭔데? 민주주의가 뭔데?”

오월제가 한창이었다. 문익환 목사님의 콧소리 섞인 애절하고도 강력한 목소리가 이 단순한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크로폴리스에 모였던 2000여 명의 학생들은 뜨거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때, 정적을 가르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군부 독재 타도하자!”

당시 교정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구호였다. 그러나 그날 그 목소리는 달랐다. 악에 바친 듯한 그 처절한 외침은 문익환 목사님의 절규와 겹쳐지며, 눈물범벅이 된 학생들의 얼굴을 한쪽으로 일제히 돌리게 했다. 아크로폴리스 왼쪽, 학생회관 건물 4층 보건소 위 옥상이었다.

순간, 학생들의 얼굴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일그러졌다.

“안 돼—!”

하늘과 맞닿은 그곳에서 불길이 솟고 있었다. 불길에 휩싸인 그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끝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군부독재 타 ….”

그는 난간 없는 옥상 끝을 향해 비칠비칠 걸어 나왔다. 그리고 너무도 가볍게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사람의 몸이 그렇게 가볍게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수많은 학생들이 한꺼번에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하고 있던 완전무장한 전경들을 밀치고 보건소 쪽으로 달려갔다. 겁에 질린 전경들은 마구잡이로 최루탄을 발사했다. 교정은 순식간에 전쟁터가 되었다. 하얀 최루탄 가루가 사방을 뒤덮었다. 나는 그 순간, 하얀 눈으로 덮인 들판에 혼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했다.

아크로폴리스 계단 중간쯤 왼쪽 끝에 앉아 있던 나는 치솟는 화염을 보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다.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경들이 소지하던 비상용 소화기로 불이 꺼진 뒤였다. 희뿌연 소화기 분말에 덮인 희미한 사람의 형상이 누워 있었다.

나는 그 하얀 형체 옆에 얼마 동안인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평소 그렇게 큰 공포의 대상이던 완전무장한 전경들이 바로 내 곁에 떼로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곳을 빠져나오는데, 같은 과 친구 하나가 최루탄에 질식되어 토할 듯 심하게 기침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침 집에 가는 방향이 같았다. 나는 정신을 못 차리는 그 친구를 부축해 버스를 타고, 전철을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1986년 5월 20일. 대학 1학년으로 처음 맞은 축제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불길 앞에 남은 질문

이틀 동안 먹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는 같은 질문만 수천 번, 수만 번 떠올랐다.

‘도대체 왜?’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 출세를 위한 지름길이라고들 말하던 서울대학교에 들어온 사람이 왜 그렇게 처절하게 절규해야 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자기 몸에 불을 붙이게 했을까. 어떤 마음이면 사람이 그렇게 자신을 내놓을 수 있을까.

이틀 동안 멍하니 생각한 끝에, 나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서울대까지 온 사람이 저렇게 자신을 불태워 죽일 때에는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게 있다. 그 사람이 목숨을 바쳐서 항거하고자 한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진실한 것이다. 그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때 나는 미처 몰랐다. 내가 목격한 것은 단지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자기 몸을 불사르면서까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세상 앞에 드러내려 한, 처절한 사랑의 한 모습이었다.

새로운 삶의 시작

사흘째 되는 날 학교에 갔다. 정문 앞에는 전경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사람만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쪽문 앞에서 전경들이 양쪽으로 줄을 지어 검문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곳을 통과할 때마다 가슴이 졸아들었다.

자연대 건물 뒤 잔디밭에 우리 과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원래는 물리학 수업이 있던 시간이었다. 가까이 가서 조용히 앉아 들어 보니, 분신투쟁에 동조하는 수업 거부 투쟁을 할 것인지 논의하고 있었다.

본래 남들 앞에서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은 그냥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공부도 좋고 꿈도 다 좋은데, 지금은 사람이 죽었으니 그 사람이 왜 죽었을지를 알아보고, 그 이유가 합당한 것이라면, 적어도 함께한다는 의사는 표해야 하지 않을까?”

내 말 때문이었을까. 1학년이던 우리 과 친구들은 공대 전체에서 가장 먼저 수업 거부를 결의했다.

그날이 내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진실을 찾아 들어간 길

그가 왜 그렇게 처절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아보는 길은 의외로 단순했다. 운동권에 들어가면 됐다. 학생운동을 하던 선배들에게 뜻을 밝히자 그들은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곧바로 ‘학회’라고 부르던 한국 사회 공부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학회는 일종의 독서 모임이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같은 책을 읽고 토론했다. 당시에는 금기시되던 자료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모순과 통치자들의 본질을 조금씩 보게 되었다.

그러나 나를 정말 흔든 것은 『전태일 평전』이었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읽으며 입버릇처럼 했다는 말이 있었다.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

그 말은 이상하게도 나를 향해 오는 것 같았다.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공부로 알게 되었다면, 『전태일 평전』을 통해서는 민중들의 처지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내 마음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내가 도와야 할 민중은 멀리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의 부모였고, 형제자매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나의 결단을 감지한 선배들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나를 학생운동 조직에 가입시켜 주었다. 아마 그해 9월쯤이었던 것 같다. 어느 밀실에서 우리는 은밀하게 간단한 가입식을 했다. 가입식이 끝나자 선배가 말했다.

“너희들의 몸은 이제 너희들 자신의 것이 아니고 조국과 민족의 것이다.”

그때는 그 말이 얼마나 무겁고 위험한 말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시작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그날 이후 우리 팀은 ‘텍’, 곧 tactics의 줄임말로 불리던 지시를 받았다. 누군가 우리 중 하나에게 쪽지를 전해 주면, 우리는 그 쪽지에 적힌 대로 움직였다. 어느 날 몇 시에 어디로 가라. 거기서 ‘동’, 곧 주동자가 뜨면 함께 기습시위를 하라. 화염병 몇 개를 만들어 어디까지 운반하라. 유인물을 몇 장 만들어 시위에서 뿌리라. 그런 지시들이었다.

우리 팀은 모두 네 명이었다. 검문과 검색을 피해야 했기에 늘 식은땀이 날 만큼 두려웠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며 움직였다. 우리의 귀한 부모형제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순수한 연민으로.

낡은 운동화와 가죽 로퍼

어느 날 충무로 어딘가에서 시위 텍이 내려왔다. 인쇄물은 바짓단 속 종아리 둘레에 양말로 끼워 운반하기도 했고, 가방 속에 태연하게 넣고 운반하기도 했다. 그날 나는 가방 속에 반독재 유인물을 잔뜩 넣고 버스를 탔다.

충무로에 거의 다 왔을 때 갑자기 전경들이 버스에 올라타 검문을 시작했다. 비교적 사람이 많아 전경들이 쉽게 뒤쪽으로 오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바로 그때 누군가 창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낭패였다. 그쯤 되면 버스를 세워 놓고 전체를 검문할 터였다. 어쩔 수 없이 우리도 창문으로 탈출했다.

그렇게 모인 시위대가 50여 명쯤 되었다. 곧 동이 떴고 기습시위가 시작되었다.

당시 기습시위는 보통 3분에서 5분이 고작이었다. 정보가 샜는지, 아니면 서울 전역에 전경들이 늘 깔려 있었는지, 순식간에 전경들이 밀어닥쳤다. 청바지와 재킷을 입고 운동화를 신은 백골단들이 전면에 섰다. 그들은 쏟아지는 돌과 화염병을 뚫고 시위대를 잡기 위해 달려드는 특수부대였다.

싸움을 잘하는 날렵한 학생들이 전면에서 돌과 화염병으로 방어했다. 나는 잘 뛰지도 못하고 겁도 많아 전선 가까이 가지 못했다. 대신 주변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주거나 짧게 구호를 외쳤다. 받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면 길바닥에라도 뿌렸다. 원하는 사람이 몰래 주워 갈 수 있도록.

시위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앞에서 전경들과 맞서 싸우던 친구들이 점점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 틈을 타 백골단들이 곤봉을 들고 들이닥쳤다. 흩어져 빠져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때 앞쪽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친구가 있었다. 같은 과 친구였다. 그는 전경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고 있었다. 반갑고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퇴각하던 그의 발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낡은 운동화가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 친구도 그것을 의식하는 듯했다.

다음 날 학교에서 그 친구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그 낡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전날 전경들 앞에서 물러서지 않던 발이었다. 그런데 그 발끝에서 운동화가 다시 헐떡거리고 있었다.

나는 내 발을 내려다보았다. 간호학과 학생이던 누나가 용돈을 모아 사 준 영에이지 가죽 로퍼를 신고 있었다. 생전 처음 신어 보는 가죽 구두였다. 갑자기 그 신발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야, 나 이 신발 너무 커서 그런데 너 신을래?”

“그래? 한번 신어 볼까? … 딱 맞네. 고맙다, 야.”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때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부르기에는 너무 쑥스러웠을 것이다. 다만 친구의 낡은 운동화가 마음에 걸렸을 뿐이다.

먼 길을 돌아온 뒤에야 알았다.

그것도 사랑이었다.

포위된 교정

그렇게 시위와 지시 속에서 10월이 되었다. 어느 날 특별한 텍이 내려왔다. 건국대학교에서 집회가 있으니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팀 넷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마음으로 집회 장소에 갔다.

당시 조국의 자주화와 민주화를 위한 투쟁위원회 의장이던 정형곤 씨가 연설을 했다. 내용은 많이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그의 진정성과 열정은 멋있었다.

한참 집회가 이어지는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주변에는 전경들이 평소보다 훨씬 많이 모여 있었다. 다른 때처럼 빨리 도망가야 하나 서로 얘기하고 있는데, 이미 학교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집회를 막기 위해 경찰은 3000명의 전경을 동원했다.

3000명의 전경은 어마어마했다. 집회가 열리던 교정으로 밀고 들어오던 그들의 모습은 해변으로 밀려오는 거친 파도 같았다. 그들이 쏘는 최루탄은 하얀 포말처럼 평화로운 교정을 뒤덮었다.

우리 과 친구들 네 명은 가장 가까운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대학 본부 건물이었다. 내부가 거대한 사각형 굴뚝처럼 텅 비어 있었다. 전경들이 쫓아올까 봐 학생들은 3층과 4층으로 피신했다. 우리는 3층에 있었다. 사무실에서 집기를 끌어내 2층과 3층 사이 계단에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그렇게 강제된 점거농성이 시작되었다.

첫날 저녁, 여기저기서 찾은 먹을거리를 나누었다. 우리 네 명에게는 컵라면 하나와 초코파이 두어 개가 주어졌다. 서로에게 양보하느라 부족하다는 말도 못 했다. 그걸로 끼니를 때우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최루탄 가루가 온몸에 묻어 있었다. 교정 사방에도 허옇게 쌓여 있었다. 공기 중에 떠도는 가루와 가스로 눈과 목이 아팠다. 항상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했다. 한두 시간쯤 지나 조금 적응이 될 만하면 배고픔이 몰려왔다. 우리는 둘러앉아 밖에 나가면 무엇을 먹을까 이야기하며 허기를 달랬다. 한 친구가 늘 우리를 웃게 해 주었다.

우리는 겁이 났지만, 겁이 난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틀째 저녁이 되어서야 음식이 조금 나왔다. 전날보다 더 적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초코파이 한두 개가 우리 팀에게 주어진 전부였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것마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누구 하나 배고프다고 칭얼대거나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 하지 않았다.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 양보했다. 고통을 참고 견디며 서로를 배려했다.

유독가스 속에서

3일째 새벽, 우당탕탕 하는 소리에 잠이 깼다. 경주가 우리를 급히 깨웠다.

“야, 짭새들 쳐들어온다. 빨리 일어나!”

다들 일어나는 순간 건물 안쪽에서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따닥따닥 났다. 복도와 계단 쪽 문을 열고 살펴보니, 백골단들이 바리케이드로 쌓아 둔 가구들을 헤치고 있었다. 우리 네 명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할 만큼 놀라고 무서웠다. 아무도 그 무서움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때 여기저기서 불안한 고함이 들렸다. 학생들이 진압군들을 향해 항의하는 소리도 들렸다. 안쪽에서 백골단들이 올라올 길을 만들고 있는 동안, 바깥 건물 주변에는 전경들이 매트리스를 깔고 있었다. 투신이나 추락에 대비했다는 구색을 갖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 매트리스가 오히려 큰 문제를 일으켰다. 옥상에서 아래를 향해 던진 화염병에 불이 붙으면서, 건물 사방의 매트리스들이 시커먼 유독가스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 가스는 굴뚝처럼 텅 빈 건물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순식간에 건물 안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고 숨도 쉴 수 없는 공간으로 변했다. 방독 마스크를 한 진압군을 더 이상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 팀은 얼른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사무실 안에는 유독가스가 들어오지 않았고, 외부로 난 창문도 있었다. 그러나 안쪽 복도에 있던 학생들은 모두 옥상으로 피신하고 있었다. 우리는 3층 경계를 맡고 있어서 조금 늦었다. 이제 결정을 해야 했다. 백골단들이 겁을 주려고 벽을 두드리는 방망이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앞사람의 허리띠를 잡기로 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옥상까지 뛰어야 했다. 내가 맨 앞에 섰다. 길잡이를 해야 했다.

문을 열고 나가자 새까만 유독가스가 가득했다. 겁에 질린 학생들이 기침을 하며 더듬더듬 옥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2~3분쯤 지났을까. 숨이 너무 막혔다. 한 번은 쉬어 가야 했다. 열려 있는 사무실 하나로 들어갔다. 친구들도 따라 들어왔다.

그런데 경주가 보이지 않았다.

“야, 경주 어디 갔어?”

“나도 몰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

꼬리였던 경주 바로 앞의 친구가 말했다. 어찌할 수 없었다. 유독가스 속에서 뒤를 확인할 수 없었고, 백골단들은 이미 3층 가까이 올라온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다시 복도로 나갔다. 숨을 참은 채 앞사람들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숨을 들이켰을 때, 목으로 넘어가는 유독가스가 몸속을 긁는 것 같았다. 숨을 쉬어도 산소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절망적인 생각이 스치던 순간, 앞쪽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외부 공기로 연결된 지점이었다. 한두 걸음 뒤에는 세상이 환하게 보였다. 옥상에는 이미 학생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모여 있었다. 토해내듯 거친 기침을 하며 자지러지는 학생들이 많았다. 얼굴들은 굴뚝 속을 지나온 사람들 같았다.

그때 옥상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백골단들이 치고 올라왔다. 뒤이어 전경들이 밀려들었다. 그들은 기선을 제압하려고 고함을 지르며 진압봉으로 사정없이 사람들을 때렸다.

“꿇어앉아!”

“머리 숙여. 안 숙이면 대가리 깨진다!”

나는 얼른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흘깃 바라본 쪽에서는 정말 맞아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무서운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다른 학생들을 자기 아래 두고 진압봉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학생들이 있었다.

학생들은 흉악한 범죄자처럼 취급받았다. 닭장차라고 부르던 전경버스에 탈 때도 앞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이라고 소리쳤다. 실수로 고개라도 들면 진압봉이 날아들었다. 버스 안에서도 서로 속삭이지 못하게 했다.

전경들은 우리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들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나도 학회에서 공부하기 전에는 진실을 몰랐다. 군대에서 반대의 교육을 받은 그들이야 어땠겠는가. 방식은 달랐지만, 그들 역시 그 시대가 만든 또 다른 피해자였다.

건대사건으로 1288명이 동시에 구속되었다.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구속자를 낸 사건이라는 말도 있었다. 붙잡힌 학생들은 서울 시내 여러 경찰서로 흩어졌다.

나는 종로경찰서로 갔다. 그래도 경찰서는 나았다. 더 이상 막무가내로 진압봉을 휘두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먹을 수 있었다. 며칠 만에 먹는 식사였다. 꽁보리밥에 단무지가 전부인 유치장 식사도 정말 꿀맛이었다.

시간을 나누어 전경들이 쓰는 세면실에서 3~4분 정도 씻게 해 주었다. 그 짧은 시간에 찬물로라도 머리를 감았다. 몇 번을 씻어도 유독가스의 그을음 때문에 새까만 물이 줄어들지 않았다. 몸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검댕이가 다 사라지는 데는 2주 정도가 걸렸던 것 같다. 여학생들의 얼굴 여기저기에 검댕이가 남아 있고, 머리카락이 수세미처럼 엉켜 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며칠간의 조사가 끝나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머리를 짧게 깎고 수의를 입었다. 배정된 감방에 들어가 마음이 조금 진정되자, 가장 먼저 친구들이 궁금해졌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경주의 처절한 사랑

구치소 운동장에 나가 처음 운동을 하는 날,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가장 궁금한 것은 옥상으로 피신하는 길에 헤어진 경주였다.

운동장에 하나둘 모이더니 과 친구들 넷이 다 모였다.

경주가 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부끄러워 반가운 내색도 못 했다. 그래도 가슴이 울컥하고 콧날이 찡했다. 경주가 장난기 섞인 사투리로 말했다.

“야, 내 대가리 한 번 만져봐.”

정수리 주위가 물풍선처럼 물컹물컹했다. 대충 짐작은 갔지만, 너무 놀라 아무도 묻지 못했다. 경주가 말했다.

“야야, 맞아 디져버리는 줄 알아씨야. 이것땜시 병원도 갔다왔당께. … 전경놈들한테 3층에서 처음 잡혀 갖고 징허게 맞어 부렀다.”

그제야 알았다. 경주는 3층에서 우리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그는 남았다. 우리가 피신할 수 있도록 뒤를 지키려 했던 것이다.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알면서도, 그는 그 자리에 남았다.

경주는 본관에서 가장 먼저 잡힌 학생이었다. 악에 바친 전경들은 그를 심하게 때렸다고 했다. 머리를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정수리 주위가 물풍선처럼 부어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유독가스와 진압봉 사이에 자기 몸을 남겨 두었다.

처절한 사랑이었다.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같으면 서로 안아 주며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마음은 그랬으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우리는 마치 ‘살아왔으면 됐지, 뭘 그리 호들갑이냐’는 듯, 경주의 농담 같은 말 앞에서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는 죽지 않고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처절한 사랑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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