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을 이렇게 배웠다--제1회 처절한 사랑의 시작
“민주주의가 뭔데? 민주주의가 뭔데? 민주주의가 뭔데?”
오월제가 한창일 때 문익환 목사님의 콧소리 섞인 애절하고도 강력한 목소리가 이 단순한 질문을 반복하고 있을 때, 아크로폴리스에 모였던 2000여 명의 학생들은 뜨거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때 바로 그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군부독재 타도하자!”
당시 교정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구호였지만, 메아리처럼 그 정적을 가르며 멀리서 들리는 그 악에 바친 처절한 목소리는 문익환 목사님의 절규와 합해져서 2000여 명의 눈물범벅이 된 학생들의 얼굴을 한쪽으로 일제히 돌리게 했다. 바로 아크로폴리스 왼쪽 학생회관 건물 4층 보건소 위 옥상이었다.
순간 두 줄기 눈물이 흐르던 모든 학생들의 얼굴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처절하게 일그러졌다.
“안 돼---!”
하늘과 맞닿은 그곳에는 이미 새빨간 화염이 맹렬히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그 움직이는 불덩어리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소리 질렀다**.** 비록 그 끝은 점점 흐려졌지만.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군부독재 타 ….”
그 불덩어리는 본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난간 없는 옥상 끝을 향해 비칠비칠 걸어 나온다 싶었는데, 마치 불붙은 짚단을 아래로 던진 것처럼 너무도 가볍게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수많은 학생들이 한꺼번에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하고 있던 완전무장한 전경들을 밀치고 보건소 쪽을 향해서 달려갔다. 겁에 질린 전경들은 마구잡이로 최루탄을 발사하기 시작했고, 주변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너무나 힘들면 환상이 보인다더니, 하얀 최루탄 가루로 뒤덮인 교정에 서있던 나는 순간 하얀 눈으로 뒤덮인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듯한 착각을 했다.
아크로폴리스 계단 중간 즈음 왼쪽 끝에 앉아 있던 나는 치솟는 화염을 보자마자 “아!” 하는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쏟으면서, 그쪽을 향해 달렸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경들이 소지하던 비상용 소화기를 있는 대로 쏟아부어서 불은 꺼져 있었다.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희뿌연 소화기 분말이 쌓여 있는 꺼진 불덩이 위로, 달구어진 프라이팬 위에서 고기가 익어갈 때처럼, 지글지글 기름이 끓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하얀 사람의 형체 바로 옆에 서서 얼마 동안인가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평소에 그토록 큰 공포의 대상이던 완전무장한 전경들이 내 바로 옆에 떼거리로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을 얼른 빠져나가는데, 같은 과 친구 하나가 최루탄에 질식되어 토할 듯이 심한 기침을 하고 있었다. 그 친구와 나는 마침 집 가는 방향이 같았다. 최루탄에 질식되어서 정신을 못 차리는 그 친구를 부축해서 버스를 타고 전철을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1986년 5월 20일, 대학 1학년 처음으로 맞은 축제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틀 동안 먹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이 수천수만 번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이자 출세를 위한 지름길이라는 서울대학교 학생을 저렇게 처절하게 절규하게 하고 나아가 그로 인해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게 한 것인가? 도무지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이틀 동안의 멍한 생각 끝에, 내가 나름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서울대까지 온 사람이 저렇게 자신을 불태워 죽일 때에는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게 있다. 그 사람이 목숨을 바쳐서 항거하고자 한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진실한 것이다. 그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3일째 되는 날 학교에 갔다. 정문 앞에 전경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사람만 통과할 수 있는 쪽문 앞에서 전경들이 양쪽으로 줄을 지어 검문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곳을 통과할 때면 나는 언제나 가슴이 졸아들었다.
자연대 건물에서 물리학 수업이 있던 시간이었는데, 그 건물 뒤 잔디밭에 우리 과 친구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고 있었다. 조용히 가서 앉아 들어보니 분신투쟁에 동조하는 수업거부 투쟁을 하자는 학생회의 지침에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본래 남들 앞에서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닌 내가 나서서 한마디 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도 좋고 꿈도 다 좋은데, 지금은 사람이 죽었으니 그 사람이 왜 죽었을지를 알아보고, 그 이유가 합당한 것이라면, 적어도 함께 한다는 의사는 표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그 말 때문이었을까, 1학년이던 우리 과 친구들이 공대 전체에서 가장 먼저 수업거부를 결의하게 되었다. 그날이 내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왜 그분이 그렇게 처절하게 싸우며 돌아가시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쉬웠다. 운동권에 들면 됐다. 학생운동을 하는 선배들에게 뜻을 밝히자 열렬히 환영해 주었고, 곧바로 학회라고 부르던 한국 사회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는 모임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학회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등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일종의 독서 클럽이었다. 학회에서 광주민주화 운동 비디오 등 당시에는 금기시 되던 은밀한 자료들을 통해 전두환 독재자 무리에 의한 광주 양민 학살 사건의 본질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왜 민주주의를 그토록 처절하게 외치는지, 독재타도를 가열차게 외치는지를 그 마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열사들의 분신의 이유도 조금이나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큰 감명을 주고, 운동가의 삶을 살겠다는 마음을 갖게 한 것은 <전태일 평전>이었다. 열사께서 근로기준법을 읽으시면서 답답함에 입버릇처럼 하셨던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씀이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해방전후사, 한국 근현대사 등 공부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알게 되었다면, <전태일 평전>을 통해서는 민중들의 처지를 알게 되고 민중들에 대한 지식인의 책임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내가 민중들의 답답함을 도와드릴 수 있는 그런 “대학생”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 특권을 누리는 지식인으로서 도와주어야 할 민중이 다름 아닌 나의 부모와 형제자매들이었다.
나의 결단을 감지했던 선배들이 몇몇 친구들과 함께 나를 학생운동 조직에 가입시켜 주었다. 아마 9월쯤이었던 것 같다. 어느 밀실에서 만난 우리는 은밀하게 간단한 가입식을 했다. 가입식을 마치고 “너희들의 몸은 이제 너희들 자신의 것이 아니고 조국과 민족의 것”이라는 선배의 말에 정말 가슴이 벅찼다.
그날 이후로 우리 팀은 ‘텍 (tactics의 줄임말)’이라는 것을 받았다. 누군가 우리 중 하나에게 쪽지를 전해 주면 그 쪽지에 쓰여 있는 대로 했다. 어떤 쪽지는 “몇 날 몇 시에 어디로 가라. 거기서 ‘동(주동의 줄임말)’이 뜨면 함께 기습시위를 해라,” 어떤 쪽지에는 “화염병 몇 개를 만들어서 어디까지 운반해라,” “유인물을 몇 장 만들어서 시위에서 뿌려라” 등이 적혀 있었다. 우리 팀은 모두 4명이었는데, 서로 의지해 두려움을 이겨내면서 신나고 재미있게 일을 했다.
어느 날 충무로 어딘가에서의 시위 텍이 내려왔다. 인쇄물은 바짓단 속 종아리 둘레에 양말에 끼워서 운반하기도 하고, 가방 속에 태연하게 넣고 운반하기도 했다. 그날 나는 가방 속에 반독재 유인물을 잔뜩 넣어서 태연하게 버스를 타고 갔다.
정보가 새어 나갔던 것 같다. 충무로에 거의 다 왔을 때 갑자기 전경들이 버스에 올라타서 검문을 시작했다. 비교적 사람들이 많이 탄 상태여서 전경들이 쉽게 뒷부분으로 오지 못하고 있었다. 순간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작전을 나누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 창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낭패가 되었다. 그쯤 되면 버스를 막아 놓고 전체를 검문할 터였다. 어쩔 수 없이 우리도 창문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인 시위대가 50여 명 되었다. 거기서 동이 떴고 기습시위가 시작되었다.
보통 당시의 기습시위는 3 내지 5분이 고작이었다. 정보가 샜는지, 아니면 그만큼 서울 전역에 전경들이 항상 깔려 있었는지, 순식간에 전경들이 밀어닥쳤다. 회색 바탕에 하늘색 줄이 그어진 헬멧을 쓰고 체포를 위해 청바지와 재킷을 입고 운동화를 신은 소위 백골단들이 항상 전면에 있었다. 쏟아지는 돌과 화염병을 뚫고 시위대를 잡기 위해 달려드는 무술 유단자로 구성된 특수부대였다. 이들 중에 교도소에서 범죄자들을 차출하여 구성한 부대도 있다는 말도 떠돌았다.
그날은 시위대의 규모가 다른 날에 비해 비교적 컸다. 싸움을 잘하는 날렵한 학생들이 전면에서 돌과 화염병으로 방어를 잘해 주고 있었다. 그 사이에 잘 뛰지도 못하고 겁이 많아서 전선 가까이에 가지 못하는 나는 주변 시민들에게 선전전을 했다. 구호를 외치거나 서서 짧은 연설을 하거나 혹은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다. 당시는 유인물을 주어도 받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길바닥에라도 뿌려서 원하는 사람들이 몰래 주워 갈 수 있게 했다. 그런 유인물을 소지하고 있다가 걸리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몰려서 패가망신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게 최선이었다.
시위가 거의 마무리되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때 앞에서 전경들과 맞서 싸우던 친구들이 점점 뒤로 물러나오고 있었는데, 그 틈에 백골단들이 곤봉을 들고 들이닥쳤다. 본격적으로 흩어져 그 지역을 빠져나가야 할 때다. 뒤처진 사람들이 붙잡히는 때가 주로 그때다. 그러니 퇴각할 때도 긴장이 여간 아니었다.
그렇게 천천히 퇴각을 하고 있는데, 유난히 앞쪽에서 전경들을 향해서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지며 싸우는 친구가 돋보였다.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던 과 친구였다. 너무나 반갑고 자랑스러웠다. 점점 퇴각하던 그 친구의 신발이 헐떡거려서 그것을 의식하는 것을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낡은 운동화 때문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그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여전히 그 낡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때 나는 국립의료원 간호학과 학생이던 누나가 용돈을 모아 사준 영에이지라는 생전 처음 신어보는 가죽 로퍼를 신고 있었다. 그 친구에게 그 신발을 주고 싶었다.
“야. 나 이 신발 너무 커서 그런데 너 신을래?”
“그래? 한번 신어볼까? … 딱 맞네. 고맙다 야.”
그렇게 계속되는 일과 시위 속에서 10월이 되었다. 어느 날 특별한 텍이 내려왔는데, 건국대학교에서 집회가 있으니 참가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팀 넷은 언제나와 같이 특별할 것도 없는 마음으로 집회 장소로 갔다. 당시 조국의 자주화와 민주화를 위한 투쟁위원회 의장이던 정형곤 씨가 연설을 하는데, 내용은 많이 들었던 뻔한 얘기였지만, 그 진정성과 열정이 멋있었다.
한참 집회를 하고 있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학생들이 웅성웅성하고 주변에 전경들이 평소보다 더 많이 모였다. 다른 때와 같이 빨리 도망가야 하나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이미 학교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약 1100여 명의 학생들의 평화적인 집회를 막기 위해 그날 경찰은 3000명의 전경을 동원했다.
3000명의 전경은 어마어마했다. 집회가 열리던 교정으로 밀고 들어오던 전경들의 모습은 흡사 평화로운 해변을 덮치는 쓰나미 같았다. 그들이 무차별 난사하는 최루탄은 쓰나미가 만들어 내는 포말과 같이 순식간에 평화로운 교정의 하늘을 뒤덮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우리 과 친구들 네 명은 함께 가장 가까운 건물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대학 본부 건물이었는데, 거대한 사각형 굴뚝과 같이 내부가 텅 비어 있었다. 전경들이 쫓아올까 봐 학생들은 3층과 4층을 점거했다. 우리들은 3층에 있었는데, 여학생들이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는 모습도 보였다. 사무실들에서 집기를 끌어내서 2층과 3층 사이 계단에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그렇게 강제된 점거농성이 시작되었다.
첫날 저녁에는 여기저기서 찾은 먹을거리를 나누어 먹었다. 우리 네 명에게는 컵라면 하나와 초코파이 두어 개가 배급되었다. 서로에게 양보하느라 부족하다는 말도 못 하고 그걸로 끼니를 떼우고 잠을 청했다. 선배들은 보초를 서기도 했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날 때 고통스러웠다. 최루탄 가루가 온몸에 묻어 있었고 교정 사방에 허옇게 쌓여 있었기 때문에 공기 중에 떠도는 가루와 가스로 인해 눈과 목이 너무나 아팠다. 항상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만 했다. 한두 시간 후 그나마 좀 적응이 될 만하면, 배고픔이 몰려왔다. 우리 네 명은 둘러앉아 밖에 나가면 무엇을 먹을까 얘기를 나누며 허기를 달랬다. 한 친구가 늘 우리를 웃게 해 주었다. 우리는 겁이 났지만, 상황을 받아들이고, 의젓하게 행동했다.
이틀이 지났다. 저녁이 되어서야 음식을 나누어 주었는데, 어제보다 더 줄어들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초코파이 한두 개가 우리 팀에게 주어진 전부였던 것 같다. 어쩌면 전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도 배고프다고 칭얼대거나,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선배들은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먹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1-2학년들에게만 주어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들도 먹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의젓하게 거절했었지만,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만큼은 먹었다.
3일째 되는 날 새벽에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주가 우리를 급하게 깨웠다.
“야, 짭새들 쳐들어온다. 빨리 일어나!”
다들 일어나는 순간에 건물 안쪽에서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따닥따닥 났다. 안쪽 복도와 계단이 있는 쪽 문을 열고 살펴보니, 백골단들이 바리케이드로 쌓아 둔 가구들을 헤치고 있었다. 우리 네 명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할 만큼 놀라고 무서웠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때 “어, 어” 하는 불안과 염려의 고함들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학생들이 진압군들을 향해서 비난하는 소리도 들렸다. 무리한 진압을 시도하는 그들이 얼마나 무도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그런 세상이 실제로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안쪽에서 백골단들이 바리케이드를 치우며 올라올 길을 만들고 있는 동안, 바깥 건물 주변에는 전경들이 매트리스를 바닥에 깔았다. 투신 혹은 추락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안전을 위해 조치를 했다는 구색을 갖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큰 문제를 일으켰다. 옥상에서 아래를 향해서 싸우던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에 의해 건물 사방에 깐 매트리스에 불이 붙으면서 시꺼먼 유독가스를 일제히 뿜어냈기 때문이다.
건물을 사방으로 둘러싼 불붙은 매트리스들이 뿜어내는 그 유독가스는 이내 굴뚝처럼 내부가 텅 빈 건물 안으로 빨려 들어왔고, 건물 안쪽을 유독가스로 가득 채웠다. 건물 전체는 순식간에 한 치 앞을 볼 수 없고 산소가 없어 숨도 쉴 수 없는 죽음의 공간으로 변하고 말았다. 방독 마스크를 한 진압군들을 막을 수 있는 상황이 더 이상 아니었다.
우리 팀은 얼른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사무실 안에는 아직 유독가스가 들어오지 않았고, 또 외부로 난 창문도 있었기 때문에 공기가 나빠지지 않았다. 전경들을 막기 위해 내부 복도 쪽으로 나가 있던 학생들은 모두 유독가스가 차오르는 것을 보고 옥상으로 피신을 했다. 우리는 3층 경계를 맡고 있어서 좀 늦었다. 우리도 결정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백골단들이 겁을 주기 위해 딱딱 벽을 두드리는 방망이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었다.
우리는 앞사람의 허리띠를 굳게 잡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옥상으로 뛰기로 했다. 내가 맨 앞에 섰는데 길잡이를 해야 했다. 옥상으로 가는 계단과 가까운 쪽 문을 열고 나가는데, 새까만 유독가스가 가득했다. 잔뜩 겁에 질린 학생들이 기침을 하면서 더듬더듬 옥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2~3분이 지났을까? 숨이 너무 막혔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일단 한 번은 쉬어가야 했다. 열려 있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친구들도 따라 들어왔는데, 경주가 보이지 않았다.
“야, 경주 어디 갔어?”
“나도 몰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
꼬리였던 경주 바로 앞 친구가 말했다. 일단 어찌할 수 없었다. 유독가스 속에서 뒷상황을 전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이미 백골단들이 3층까지 거의 다 올라온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복도로 나갔고, 숨을 참은 채 앞사람들을 따라서 질서 있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던지. 더 이상 숨을 참을 수가 없어서 숨을 들이켰을 때 목으로 넘어가는 유독가스로 인해 더욱 고통스러웠다. 공기 중에 전혀 산소가 없는 듯했다. 숨은 들이마셔도 산소에 대한 갈증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아,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절망적인 생각을 하던 순간 앞쪽이 희뿌염하게 밝아왔다. 외부 공기로 연결된 부분까지 올라온 것이다. 불과 한두 걸음 후에는 환하게 보였다. 옥상에는 이미 학생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모여 있었다. 토해내듯 거친 기침을 하며 자지러지는 학생들이 많았다. 본래부터 옥상에 있던 학생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얼굴이 굴뚝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 같았다. 얼굴이 새까만 학생들이 그렇게 서로를 보며 당황하고 있을 때 옥상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백골단들이 치고 올라왔다. 뒤이어 전경들이 밀려들었다.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그들은 고함을 지르면서 진압봉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꿇어앉아!”
“머리 숙여. 안 숙이면 대가리 깨진다!”
무서워서 얼른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면서 백골단들이 있는 곳을 흘깃 봤는데, ‘저러다 정말 맞아 죽는 사람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공포가 온몸을 엄습했다. 그런 무서운 상황 속에서도 다른 학생들을 자기 아래 두고 진압봉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학생들이 있었다. 1미터 남짓되는 시꺼먼 진압봉들이 다디미질을 하듯 허공과 학생들의 등짝 위를 왕복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마치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죄인들처럼 개돼지 같은 취급을 당했다. 닭장차라고 부르던 전경 버스에 탈 때도 앞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이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실수로 고개라도 들라치면 진압봉이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버스 안에서도 그들은 고개를 숙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서로 속삭이지도 못하게 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와는 달리 전경들은 우리들에게 악에 바쳐 있었다. 얼마나 가스라이팅을 했겠는가? 우리와 같은 또래인 그 친구들을 우리는 미워하지 않았다. 우리와 그들을 적으로 만든 자들과 그 상황을 미워했을 뿐이다.
정권의 연장에 혈안이 된 군부독재의 희생양으로 1100여 명이 그날 검거되었고 전원 구속되었다. 구속자 수가 가장 많은 단일 사건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는 말이 있었다. 그렇게 붙잡힌 학생들은 서울시에 있는 모든 경찰서들에 분산되었다.
나는 종로경찰서로 갔다. 그래도 경찰서는 나았다. 더 이상 막무가내로 진압봉을 휘두르지 않았다. 가장 좋았던 것은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며칠 만에 먹는 식사이기에, 꽁보리밥에 단무지가 전부인 유치장 식사도 정말 꿀맛이었다. 시간을 나누어서 전경들이 쓰는 세면실에서 3~4분 정도 씻게도 해 주었다. 그 짧은 시간에 찬물로라도 머리를 감았다. 몇 번을 씻어도 유독가스의 새까만 그을음 물이 줄어들지를 않았다.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까만 그을음이 다 사라지는 데는 한 2주 정도가 걸렸던 것 같다. 꽃같이 예쁘던 여학생들의 얼굴 여기 저기에 검댕이 남아 있고, 머리카락이 수세미처럼 엉켜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몇일 간의 조사가 끝나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머리를 짧게 깎고, 수의를 입혔다.
배정된 감방에 가서 마음이 진정되면서 가장 먼저 친구들이 궁금해졌다. 한 친구는 같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지만, 다른 친구들은 다 헤어졌었다. 같은 경찰서에 있던 그 친구도 그나마 담당 형사가 달라서, 조사를 받을 때부터 보지 못했었다. 다행인 것은 죽은 사람은 없다는 말이었다.
처음 운동장에 나가서 운동을 하는 날,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설렜다. 옥상으로 피신하는 길에 헤어진 경주가 가장 궁금했다. 운동장에 하나 둘 모이더니 우리 넷이 다 모였다. 경주도 왔다. 부끄러워서 내색은 안 했지만 가슴이 울컥하고 눈물이 고였다. 그때,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경주가 말했다.
“야, 내 대가리 한 번 만져봐.”
머리 정수리 주위가 물풍선처럼 물컹물컹했다. 진압봉으로 너무나 두들겨 맞아서였다. 경주는 3층에서 우리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그는 남아서 백골단과 싸웠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경주는 우리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뒤를 지켜 주려 위험을 자처했다.
하지만 백골단과 상대가 되었겠는가? 다람쥐처럼 날쌔긴 했지만 바로 붙잡혔단다. 그가 본관 건물에서 가장 먼저 잡힌 학생이었다. 악에 바친 전경들은 경주를 정말 개 패듯이 팼단다. 머리도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그렇게 정수리 주위가 물풍선처럼 물이 찬 것이었다.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같으면 서로 안아 주기라도 했을 텐데, 슬픈 내색도 하지 않고 우리는 서로 눈만 껌뻑이며,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멀뚱멀뚱했다. 그래도 죽지 않고 다시 만나게 되어서 정말 감사했지만, 내 가슴 속에는 분노의 피가 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