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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만났다

장민구 지음

 

제2장   전장에 핀 한 송이 꽃 같은 사랑

출소 후, 달라진 시선

1987년이 밝았다. 감옥에서 출소한 뒤 나는 방학 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나는 중학교 친구들과 가까웠다고 생각했다. 방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그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다. 누추한 집까지 찾아와 준 것이 고맙고 반가웠다. 나는 부모님께 죄송해서 조용히 자숙하고 있던 때였다.

화장실에 다녀오던 길에, 듣지 말았어야 할 말을 들었다. 친구들이 방 안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네들 민구 조심해야 해. 민구가 무슨 일을 하다가 감방에 갔는지 알지?”

그날 그 말 때문이었을까. 그 뒤로 그 친구들과 조금 서먹해졌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도 그 말을 들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 사상이 다른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준 친구도 있었다. 그는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인근 대학교 도서관에 공부하러 간다는 핑계로 그 친구를 자주 만났다. 적어도 내가 믿고 싶었던 우정은 사상보다 넓은 것이었다.

다시 서울로, 다시 거리로

3월이 가까워졌을 때, 박종철 열사의 물고문 사망 사건이 터졌다. 더 이상 부모님만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갈 곳이 없었다. 1학년 때는 경기도 역곡에 사시던 외삼촌 댁에 신세를 지고 있었지만, 건대사건 이후 숙모가 너무 놀라셔서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던 친구 둘을 만났다. 그날부터 나는 그 둘이 함께 사는 자취방에 신세를 졌다. 신림동 어느 허름한 집의 뒷방이었다. 연탄 아궁이가 바로 방 밖에 있어서 연탄가스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둘이 겨우 자던 비좁은 방에 내가 끼어들었으니, 한두 사람은 늘 칼잠을 자야 했다.

우리 셋은 모두 공대생이었다. 그 친구들은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나는 책도 없고 가방도 없이, 오직 학생운동을 위해 학교에 다니는 사람 같았다. 라면을 먹는 날이 밥을 먹는 날보다 많았고, 반듯하게 누워 잘 수도 없었다. 그래도 그 방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식당 아주머니들의 밥

돈이 없어 살기가 힘들었다. 책을 살 돈은 말할 것도 없고, 학생회관 식당에서 파는 500원짜리 밥을 사 먹을 돈도 없었다. 학교까지 가는 버스비조차 없었다.

그래도 사람은 먹어야 산다. 그 시절 학생운동을 하던 가난한 학생들 몇몇은 그렇게 먹고 살았다. 그런 학생들을 먹여 준 것은 식당 아주머니들이었다.

학생식당에서는 스테인리스 식판에 밥과 반찬을 주었다. 돈이 없던 나는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뒤 식당으로 갔다. 먼저 식사를 마친 학생들이 반납한 식판 가운데 비교적 깨끗한 것을 하나 집었다. 잔반통에 남은 음식을 털어 내고, 마치 한 번 식사를 하고 부족해서 더 먹는 사람처럼 배식대로 갔다. 숟가락과 젓가락은 새것을 쓸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아주머니들이 더 먹는 학생에게 주는 만큼만 담아 주셨다. 그래서 한 번 더 그렇게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아주머니들은 나 같은 학생들을 알아보셨다. 그리고 새 식판에 처음 배식을 받는 학생보다 더 많이 담아 주셨다.

어쩌면 그 아주머니들 중에는 나만 한 자식을 둔 분들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가여웠을까.

그렇게 하루에 한두 끼를 먹고 살았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은 그마저도 어려웠다. 데모를 하러 친구들과 돌아다니는 날에는 밥을 사 먹을 수 없었다. 가끔 친구들이 사 주기도 했지만, 늘 얻어먹을 수는 없었다. 굶는 날과 먹는 날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그래도 이상하게 배고프다는 생각을 크게 했던 기억은 없다. 밥은 못 먹었어도 결핍을 느끼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에는 다부진 체격이었는데, 그때 몸무게는 거의 항상 52킬로그램이었다. 턱은 뾰족했고 볼은 움푹 팼다. 스스로 보기에도 초라했을 것이다.

전방 입소와 다시 시작된 폭력

무자비하게 돌아가던 시대의 시계는 나를 다시 거칠고 폭력적인 현실 한가운데로 불러내고 있었다.

어느덧 4월 전방 입소 철이 다가왔다. 학생 500여 명이 강원도 어느 전방 부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입소한 다음 날은 이재호, 김세진 열사의 기일이었다. 추모식을 하라는 텍이 있었다. 사회대의 한 친구가 동을 뜨기로 했고, 나는 그를 돕는 역할이었다.

첫날 아침부터 긴장감이 살벌했다. 그날이 이재호, 김세진 열사의 기일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입소식을 위해 연병장에 4열 종대로 줄을 섰다. 나는 동을 뜨기로 한 친구 바로 옆 줄에 섰다. 입소식 중 ‘묵념’이라는 구호에 맞춰 그 친구가 동을 뜨기로 되어 있었다.

현역 군인들과 장교들이 연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느새 묵념 차례가 다가왔다.

“묵념.”

구호가 울리고 트럼펫 연주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 친구를 곁눈질로 보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동을 뜨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 순간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두려움은 사라졌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뛰쳐오르듯 주먹으로 허공을 치며 외쳤다.

“학우여. 오늘은 이재호, 김세진 열사가 분신하신 날입니 ….”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변의 군인들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저 새끼 잡아!”

그들은 나를 땅바닥에 제압했다.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하려 했는지, 여러 명이 내 위로 겹겹이 덮쳤다. 가슴이 짓눌려 숨이 막혔다. 곧 군인들이 내 사지를 나누어 들고 어딘가로 옮겼다. 둘러싼 군인들 때문에 다른 학생들은 나를 볼 수 없었고, 나도 어디로 가는지 볼 수 없었다.

막사들 사이를 지나 어느 막사 안에 나를 집어넣었다. 플라스틱 탁자와 의자 몇 개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 동안 앉아 있었는데, 철모를 쓴 나이 지긋한 장교가 들어왔다. 제복을 입은 모습은 멋있었고 얼굴은 강인해 보였다. 그의 철모에는 빛나는 계급장이 붙어 있었고, 허리에는 권총 지갑이 있었다.

그는 내 맞은편에 앉더니 권총을 꺼내 탁자 위에 ‘탁’ 하고 내려놓았다. 탄창이 삽입되어 있었다. 겁을 주려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나는 너무 긴장해서였는지, 아니면 너무 무력하게 당해서였는지,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예의상 겁먹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 살짝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화가 나 있었다. 아마 자기의 적군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야, 내가 너 여기서 이걸로 쏴 죽이고, 훈련 중 사고로 죽었다고 해도 아무도 몰라.”

그는 잠깐 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휑하니 나갔다.

잠시 후 더 ‘무서운’ 사람이 왔다. 교련 교수님이었다. 마음이 여린 교수님은 말씀을 세게도 못 하시고 나를 설득했다.

“일단 반성문 쓰고 나가자.”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만큼의 일은 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퇴소할 때까지 훈련에 잘 참여하겠다’는 내용으로 썼다. 교수님은 고마워하셨다. 지금도 그분 얼굴이 생각난다. 참 고마운 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처참하게 잡혀가는 것을 본 다른 학생들은 즉시 집단 시위에 돌입했다고 했다. 스크럼을 짜고 연병장을 돌며 추모식을 이어 갔고, 나를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했다고 했다. 그들이 나를 혼자 두지 않았기 때문에, 군인들도 더 이상 내게 함부로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것도 사랑이었다. 누군가 붙잡혀 갈 때 혼자 두지 않는 사랑.

따뜻한 밥상과 물만두

그런 상황에서 과외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6월이 가까워질수록 거리로 나가야 하는 날은 점점 더 많아졌다.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배고픈 날이 더 많아졌다.

같이 사는 고등학교 친구의 과 선배 한 분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내 친구에게 몹시 친절했다. 덕분에 나에게도 친절했다. 생활이 너무 힘들었던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선배에게 과외 자리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서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흔쾌히 자리를 소개해 주었다. 그것은 보통 자리가 아니었다. 돈도 돈이었지만, 훗날까지 내 마음에 남는 뜻밖의 따뜻함이 된 자리였다.

과외집은 멀었다. 다행히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면 닿는 곳이었다. 신촌을 넘어 거의 종점까지 갔던 것 같다. 학생은 이대나 한양대 음대를 목표로 하던 여학생이었다. 나와 두 살 차이였으니 친구처럼 지낼 수도 있는 사이였지만, 그 어머니는 나를 깎듯이 선생님으로 대하게 했다. 부모님도 나를 그렇게 대해 주셨다.

얼마나 부잣집인지는 전혀 감이 없었다. 사실 내 눈에는 서울 사는 사람들이 다 부자였다. 알루미늄 섀시로 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루가 깔린 거실이 나왔다. 큰 밥상에서 밥을 먹었다. 중학교 1학년 남동생까지 있는 4인 가족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와 달라고 하면서 월급은 40만 원을 주셨다. 보통 20만 원에서 30만 원 정도였으니 후한 금액이었다. 내 행색이 딱해 보여서였을까. 선금으로 주셨다. 첫 월급을 받은 날 친구들을 불러 실컷 먹었다. 남은 돈 중 10만 원은 같은 방 친구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차비와 밥값으로 남겨 두었다.

학생 어머니는 체구가 아담하고 소박하면서도 예쁜 아주머니였다. 어찌나 나를 깎듯이 대해 주시는지 매번 몸 둘 바를 몰랐다. 왠지 모르지만 그 가족 모두가 나를 좋아해 주는 것 같았다. 가는 날마다 항상 온 가족과 함께 밥을 먹었다. 미안해서 거절해도 소용없었다. 그냥 먹어야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음식은 아주머니가 손으로 직접 빚어 만든 물만두였다. 만두의 배를 살짝 갈라 간장을 조금 넣어 먹으라고 알려 주셨다. 얼마나 맛있었던지, 나는 지금도 물만두를 좋아한다.

나는 불성실한 과외 선생이었다. 데모가 있으면 수업을 연기하거나, 데모를 마치고 부랴부랴 갔다. 늦게 가도, 연기해도 그분들은 늘 똑같았다. 내 옷에서 최루탄 냄새가 나서 학생이 공부하기 힘든 날도 있었다. 그래도 그분들은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는 늘 같은 옷만 입고 다녔다. 시장에서 산 베이지색 브이넥 반팔 셔츠였다. 초여름이었고, 시도 때도 없이 그 옷만 입었으니 냄새도 났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날 과외를 마치고 나오는데,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선물 봉투를 내미셨다. 부끄러운 듯 옷 하나 샀다고 하시며 입어 보라고 했다. 고마웠지만, 입어 본 적 없는 고급 브랜드의 옷을 입자니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부끄러웠다. 결국 나와 사이즈가 비슷한 친구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 옷을 입지 못했다고 해서 그 마음까지 놓친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아주머니가 내 초라함을 모른 체하지 않고, 또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다가와 주신 것을 오래 기억했다.

그분들은 내 불성실에 눈살을 찌푸리기는커녕 더 큰 친절을 베풀어 주셨다. 중학교 1학년짜리 남동생이 수학을 못 따라간다며 일주일에 한 번만 숙제를 봐 달라고 했다. 그리고 보수는 50만 원으로 올려 주셨다. 나에게는 고액 과외였다.

그 녀석은 완전히 내 팬이었다. 가서 밥을 먹고 그 녀석이 숙제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여간 졸리지 않았다. 내가 졸리는 것 같으면 그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

“형 주무세요. 제가 숙제 다 하고 깨워 드릴게요.”

그렇게 좋은 과외 자리에도 끝은 왔다.

6월이 다가오면서 나는 거의 매일 거리로 나가야 했다. 그날도 데모를 하다가 허겁지겁 그 집으로 갔다. 너무 늦어서 미안했고 경황이 없었다. 옷에서는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아주머니가 손사래를 쳤다. 나는 인사를 하시는 줄 알고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섰다. 학생 방은 현관 바로 오른쪽이었다. 아주머니는 말은 하지 못하시고 계속 손사래를 쳤다. 나는 무슨 일인지 모르고 방문을 열었다.

내 실수였다. 학생은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 바로 문밖으로 나왔다. 아주머니는 낭패를 본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계셨다.

그날 수업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학생과 어머니는 얼마나 당황했을까. 나는 더 이상 그들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 집은 처절한 나날을 보내던 내게 어머니의 품속 같은 따뜻함을 느끼게 해 주던 곳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갈 수 없게 된다는 생각이 너무 아쉬웠다. 그래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은 못 되었다.

다음 날 전화를 해서 더 이상 할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고 말씀드렸다. 아주머니는 전날 일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으셨다. 나는 선불로 받은 돈을 돌려 드리겠다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극구 받기를 거절하셨다. 사실 돌려 드릴 형편도 아니었다.

그 가족과 그렇게 갑작스레 이별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쉽다. 그 학생이 나를 편하게 따랐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의 성격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가족이 최루탄 냄새를 풍기며 불성실하게 드나들던 나를 조건 없이 받아 주었다는 사실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 가족을 다시 만나 보고 싶다. 그 시절 나를 그렇게 사랑해 주셔서 고맙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다. 그분들의 조건 없는 사랑은 매일 전쟁 같은 삶을 살던 내 마음속에 핀 한 송이 향기로운 꽃 같았다.

따뜻한 위안을 주던 그 집 문을 영영 닫고 나오던 날, 나는 다시 철저히 혼자가 된 듯한 외로움을 느꼈다. 유일한 피난처가 사라진 나의 일상은 1987년의 뜨거운 6월을 앞두고 더욱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친구 어머니의 쓰러짐과 6월의 상실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방을 옮겼다. 학교도 더 가깝고, 조금 더 넓고 깨끗한 방이었다. 그러나 훗날 민주화 대항쟁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해 6월이 다가올수록, 나는 집에 들어갈 시간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처럼 시간이 나서 속옷도 갈아입을 겸 좀 쉬려고 집에 들렀다. 방과 부엌이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방 안에 잠시 앉아 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오셔서 놀라운 말씀을 해 주셨다.

“학생 친구 어머니가 오셨었는데, 청소를 한참 하시고 난 후에 갑자기 쓰러지셔서 구급차 타고 좀 전에 다 병원에 갔어.”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하준이의 어머니였다. 하준이 어머니는 경기도 어딘가에서 식당일을 하신다고 들었었다.

자랑스러운 서울대생 외아들이 보고 싶기도 하고, 학생들의 시위가 점점 격해지는 상황에서 아들이 걱정되기도 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찾아오셔서 방과 부엌을 깨끗이 치우시고 잠시 쉬시던 중에, 갑작스러운 응급 상황이 벌어졌던 것 같다.

그 일이 있기 전, 마지막으로 셋이 함께 방에 모였던 날이 생각났다. 그날도 나는 오랜만에 방에 갔는데, 두 친구가 모두 있었다. 저녁이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돈도 없었다. 가장 어른스럽고 생활력이 강했던 하준이가 슈퍼에 가서 라면 두어 봉지를 외상으로 사 왔다. 우리는 그 라면을 끓여 국물까지 남김없이 맛있게 먹었다. 그게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 친구들을 본 마지막이었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난 것은 내가 야학 활동을 하던 1990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그는 1990년에 정상적으로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해 있었다. 더운 여름이었는데도 와이셔츠에 양복을 입고 왔다.

때마침 나는 감기 기운이 있었다. 하준이는 내가 고생한다며 몸에 좋다는 보양식을 사 주었다. 당산역 앞 시장 골목에 있는 작은 국밥집이었다. 손님은 우리 둘밖에 없었다.

골목 안은 여름 낮인데도 어둑어둑했다. 에어컨 시설은 상상도 못 하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바람이라도 통하는 문밖 자리를 잡았다. 둥근 스테인리스 쟁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등받이 없는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에 마주 앉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 3년 만이었다.

점심시간이었지만 우리는 반주를 한 잔 곁들였다. 나는 순박한 농촌 어른들처럼 농담하듯이 감기에 좋다며 소줏잔에 고춧가루를 풀어 마셨다. 긴장을 좀 낮추고 싶었다.

술잔이 두어 순배 돈 뒤에 그는 내 마음을 읽은 듯이, 아무렇지 않은 듯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들어 보니 하준이의 가족사에도,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오래되고 짙은 시대의 그늘이 있었다. 어머니와 하준이는 그 그늘 속에서 말 못 할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혼자서 외롭게 그 고통으로부터 어린 하준이를 지키셨다. 계속되는 노고에 건강이 악화되셨고, 마침내 그날 갑작스러운 변고가 생긴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듣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어머니를 잃은 그의 곁을 잠시나마 지켜 주지 못했던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6월 민주화 항쟁은 핑계였다. 진짜 이유는 상실의 고통으로 가슴에 피멍이 들었을 하준이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비록 그 곁을 지켜 주지는 못했지만, 그날 이후 하준이는 내게 영혼의 형제 같은 사람이 되었다.

승리 뒤의 허탈감

1987년 6월, 군부 독재는 국민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때의 내 눈에는 피로 얻은 가능성이 허무하게 흩어진 것처럼 보였다. 민주 진영은 분열했고, 독재자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1980년 군사 쿠데타의 2인자였던 사람이 청와대를 차지했다.

나는 허탈감과 패배주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학생운동 지도부도 우왕좌왕했다.

그 뜨거웠던 내 대학 시절이 종반으로 접어들고 있던 1988년과 1989년에 그간 놓친 과목들을 보충 수강해야 했다. 졸업은 해야 해서 공부하고 있었지만 나는 길 잃은 어린 양 같았다.

나와 같은 학번 친구들은 졸업 준비에 한창이었다. 나는 건대사건으로 인해 1년을 더 다녀야 했다. 나는 대학원 진학이나 취업 준비에 분주한 친구들 사이에서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보충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취업을 준비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시도했어도 쉽지도 않았을 테지만, 내가 선택할 길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는 내게 주어진 것을 누리겠다’는 생각을 여전히 할 수 없었다. 직선제는 이루어졌지만, 나의 삶은 물론 가난한 사람들의 삶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은 부채의식이 남아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선배가 영등포에 있는 노동자 야학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다른 선배에게 물었더니, 그 야학 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선배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그를 만난 뒤 나는 야학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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