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을 이렇게 배웠다--제2장 전장에 핀 한송이 꽃같은 사랑
나는 사랑을 이렇게 배웠다
장민구 지음
제2장
전장에 핀 한 송이 꽃같은 사랑
1987년이 밝았다. 나는 감옥에서 출소한 후 방학 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중학교 친구들과 가까웠다고 생각했었다. 방학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그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다. 누추한 집까지 찾아와 준 것이 너무나 반갑고 고마웠다. 나는 부모님께 죄송해서 자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장실에 다녀오던 길에 친구들이 방 안에서 하는, 듣지 말았어야 할 말을 듣고 말았다.
“너네들 민구 조심해야 해. 민구가 무슨 일을 하다가 감방에 갔는지 알지?”
그날 그 말 때문인지, 그 뒤로 그 친구들과 서먹서먹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친구들에게 그 말을 들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 사상이 다른 것이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준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나를 불쌍히 여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근 대학교 도서관에 공부를 하러 다닌다는 핑계로 우리는 자주 만났다. 우정은 사상과는 관련이 없었다.
3월이 가까워졌을 때, 박종철 열사의 물고문 사망 사건이 터졌다. 더 이상 부모님만 생각할 수 없었던 나는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갈 곳이 없었다. 1학년 때 경기도 역곡에 사시던 외삼촌 댁에 신세를 지고 있었는데, 건대 사건 이후 숙모가 너무 놀라셔서 더 이상 신세를 질 수가 없게 되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친구들을 만났다. 그날부터 그 둘이 같이 사는 자취방에 신세를 졌다. 신림동 어느 허름한 집의 뒷방이었는데, 연탄 아궁이가 바로 방 밖에 있어서 연탄가스 냄새가 좀 나는 것도 같았다. 둘이 겨우 자던 비좁은 방에 내가 추가되다 보니 한두 사람은 칼잠을 자야만 했다.
우리 셋이 다 공대생이었다. 그 친구들은 공부를 열심히 했다. 나는 책도 없고 가방도 없이 오직 학생운동을 위해서 학교를 다니는 사람 같았다. 라면을 먹는 날이 밥을 먹는 날보다 더 많고, 반듯하게 누워 잘 수 없을 정도로 좁은 방에서 연탄가스 냄새를 맡으며 살았지만 우리 방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돈이 없어 살기가 힘들었다. 책을 살 돈은 말할 것도 없고, 학생회관 식당에서 파는 500원짜리 밥 사 먹을 돈은 물론 학교까지 가는 버스비도 없었다. 사람이 안 먹고 어떻게 살겠는가? 어떻게든 먹어야만 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그 시절 학생운동을 하는 가난한 학생들 몇몇은 그렇게 먹고 살기도 했다. 그런 가난한 학생들을 먹여준 것은 식당 아주머니들이었다. 부끄러워서 어떻게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때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라도 먹을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학생 식당은 스테인리스 식판에 밥과 반찬을 주었는데, 줄을 서서 먼저 계산을 하고 식판을 하나 받고 배식대를 지나면서 배식하시는 아주머니들이 퍼 주시는 밥과 반찬들을 식판에 받아 먹는다. 식사가 끝나면 식판을 모으는 철제 프레임에 식판을 놓는다.
돈이 없을 때 내가 생존한 방법은 이렇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학생식당에 간다. 가장 먼저 도착해서 식사를 마친 학생들이 식판을 반납하기 시작한다. 나는 반납된 식판 중 비교적 깨끗한 것으로 누가 먹은 것인지 모르는 것을 집는다. 다시 한 번 잔반통에 남은 음식을 버린 후에 배식대로 가서 줄을 선다. 마치 한 번 식사를 하고 부족해서 더 먹는 것처럼 아주머니들이 주시는 밥과 반찬을 가져와서 식사를 한다. 물론 숟가락과 젓가락은 얼마든지 새것을 쓸 수 있다.
처음에는 한 번 먹고 부족해서 더 먹는 학생들에게 주는 양만큼만 주셔서, 한 번 더 먹어야 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렇게 한동안 하다 보면, 어떤 식당 아주머니들은 나 같은 학생들을 알아보신다. 그리고 처음 새 식판에 배식을 받는 것보다 더 많이씩 주셨다. 어쩌면, 그 아주머니들 중에는 나만 한 자식을 두신 분들도 있었으리라. 얼마나 가여웠을까?
그렇게 하루에 한두 끼를 먹고 살았다. 그나마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은 먹을 것이 없었다. 주로 데모를 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돌아다녔는데, 나는 밥을 사 먹을 수 없었다. 가끔 친구들이 사 주기도 했지만 늘 그렇게 얻어먹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굶는 날과 먹는 날이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고프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밥은 못 먹었어도 결핍을 느끼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에는 다부진 체격이었는데 그때 몸무게는 거의 항상 52킬로그램이었다. 턱이 뾰족하고 볼은 움푹 패었다. 피골이 상접하다는 말이 나를 두고 한 말이었다. 정말 볼품이 없었을 게다.
먹을 것도 먹지 못하는 판에 옷이나 신발에는 아예 신경도 쓸 수 없었다. 계절별로 윗도리 한 벌씩만 있고 바지는 항상 찢어진 청바지였다. 신발은 남대문 시장에서 형이 사 준 농구화 스타일의 가죽 운동화였다. 몇천 원 주고 작은 형이 사 주었는데 여간 튼튼하지 않았다. 한 4년을 내리 신었던 것 같다.
아마 나는 서울대학교 학생은커녕 노숙자처럼 보였을 게다. 조국의 민주화를 꿈꾸며 가난마저 훈장처럼 여겼지만, 내 안에도 또래들처럼 평범한 청춘의 낭만에 대한 호기심이 꿈틀대고 있었다. 비루한 행색으로 일일호프 미팅에 나섰다가 큰 코를 다친 일도 그 모순된 마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1학년 때부터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시던 선배 한 분이 자기네 동아리가 일일호프집을 한다며 500원짜리 티켓을 하나 주었다. 그 티켓을 들고 오면 생맥주 한 잔을 주고 자기가 잘 아는 동생과 미팅도 시켜 주겠다며 꼭 오라고 했다. 나는 설마 나에게 누구를 소개해 주겠나 하면서도, 호프집이 집에서 가깝고 주말이고 해서 나름 깔끔하게 차려입고 나갔다.
서울이 고향인 그 선배는 나와는 많이 다른 분이었다. 얼굴색, 옷차림 등으로 볼 때 잘사는 집 자제였던 것 같다. 다른 친구들에게와는 달리 나에게 친절하신 그 형이 나는 좀 이상했다. 사실 다른 친구들은 서울말씨의 그 형을 그리 친근하게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 나도 그랬다. 그럼에도 나에게 그 형은 친절했다. 약간 부담스럽긴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일일 호프에 온 학생들이 많았다. 그 형도 바빴다. 내가 들어서자 바쁜 일을 멈추고 나를 맞아 주었다. 나를 자리에 안내해 주고 맥주와 안주를 갖다 주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눈에 확 띄는 여학생 하나가 들어왔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해맑고 예뻤다. ‘저렇게 예쁜 애가 설마 형이 소개해 준다던 그 애는 아니겠지. 내 복에 무슨 ….’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형이 반갑게 그 애를 맞으며 내 앞에 앉혔다.
약대 86학번이었다. 여의도에 산다고 했다. 이름이 예사롭지 않았다. 당시에 여의도 국회의원이던 분이 흔하지 않은 성이었는데 그 성씨였다. 선배 형이 그 여자의 아버지가 엄청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었는데, 그 여학생의 말을 들으면서 아빠가 그 국회의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들도 전철, 버스를 타고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자가용을 타고 왔었다. 그 애는 내가 정말로 반가운 듯 실컷 수다를 떨었다. 나는 그 미모에 홀려서인지, 부끄러워서인지, 그냥 빙긋이 웃으며 듣고만 있었다.
다음 주에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그 예쁜 여학생과의 미팅을 자랑했다. 친구들은 곧이듣지 않았다. “그렇게 예쁜 서울대 약대 씩이나 다니는 여학생이 도대체 뭣 때문에 너 같은 촌놈을 만나겠냐”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친구들과 함께 공대깡통이라고 부르는 분식을 파는 식당을 지날 때였다. 약대에서 내려오는 계단이 있는 반대쪽에서 여학생 너댓 명이 같이 오는데, 그중에 그 애가 있었다. 그 애 친구들도 다 같이 예쁘고 세련되었지만, 그 애가 단연 돋보였다. 우쭐해진 나는 평생 내지 말았어야 할 용기를 내고 말았다.
“저 … 아가씨, 저 기억하세요?”
그 여학생은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지만 모른 체하고 그냥 지나갔다. 다른 여자애들이 깔깔거리며 하는 말이 들려왔다.
“야, 너 보고 아가씨래 … 하하하 호호호.” “하하하.”
내 친구들은 아예 잔디밭을 뒹굴며 포복절도를 했다. ‘아이 쪽팔려.’ 그렇게 나는 평생 팔아도 다 팔지 못한 만큼의 쪽이 팔렸다. 그런 귀한 ‘아가씨’가 노숙자 같은 차림의 나 같은 촌놈을 그 귀티 나는 친구들 앞에서 아는 체할 리가 있겠는가? 그 선배 형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내가 그런 ‘아가씨’와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직도 궁금하다. 어쨌든 나 같은 사람에게도 친절을 베풀어 준 고마운 분이었다.
그러나 여학생 앞에서의 민망함이나 개인적인 콤플렉스를 오래 곱씹을 여유는 없었다. 무자비하게 돌아가는 시대의 시계는 나를 다시 거칠고 폭력적인 현실 한가운데로 불러내고 있었다. 어느덧 4월 전방 입소 철이 다가왔다. 500여 명은 강원도 어느 전방 부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입소한 다음 날은 이재호, 김세진 열사의 기일이었다. 추모식을 하라는 택(tactics의 속어)이 있었다. 사회대의 한 친구가 동(주동의 속어)을 뜨기로 했고, 나는 그를 돕는 역할이었다.
우리 과 2학년 40명은 일단 입소를 거부하기로 결정하고, 그 전날 모든 준비를 다 해 와서 스페이스라는 주점에서 술 한 잔과 저녁 식사를 한 후 여인숙에서 다 함께 잤다. 다음 날 아침 밖이 소란해서 보니 전경들이 여인숙을 포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닭장차’에 탔고, 공대 학생처장님이 대절해 둔 좌석버스를 타고 수유리 어딘가의 집결지로 가서, 관광버스 십여 대에 나눠 타고 부대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부터 긴장감이 살벌했다. 그날이 이재호, 김세진 열사의 기일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았기 때문이다. 입소식을 위해 연병장에 4열 종대로 줄을 서는데, 나는 동을 뜨기로 한 친구의 줄 바로 옆 줄에 섰다. 입소식 중 “묵념”이라는 구호에 맞춰 동을 뜨기로 했었다. 현역 군인들과 장교들이 연병장을 둘러싸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어느새 묵념 차례가 다가왔다. 그리고 어김없이, “묵념”이라는 구호가 외쳐졌고, 트럼펫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 친구를 곁눈질로 보았다. 그 친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가 동을 뜨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 순간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생각에 두려움은 사라지고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뛰쳐오르듯이 주먹으로 허공을 치며 외쳤다.
“학우여. 오늘은 이재호, 김세진 열사가 분신하신 날입니 …”
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주변에 서 있던 군인들이 “저 새끼 잡아” 하는 소리와 함께 내게 달려들었다. 나를 땅바닥에 제압한 후 소리를 더 이상 지르지 못하게 하느라 그랬는지, 내 위로 겹겹이 덮쳤다. 가슴이 짓눌려 숨이 막혔다. 숨이 완전히 막히기 전에 군인들이 내 사지를 나누어서 번쩍 들어 나를 어딘가로 옮겼다. 둘러싼 군인들로 인해 다른 학생들은 나를 보지 못했다. 나도 다른 학생들은 물론 어디로 가는지도 볼 수 없었다.
많은 막사들 사이를 지나 어느 막사에 나를 집어넣었다. 플라스틱 탁자와 의자 몇 개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긴장감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 동안 앉아 있었는데 철모를 쓴 나이 지긋한 장교가 들어왔다. 제복을 입은 모습이 멋있고 얼굴은 강인해 보였다. 그의 철모에는 빛나는 계급장이 붙어 있었고, 권총 지갑을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내 맞은편에 앉더니, 지갑에서 권총을 꺼내서 자기 바로 앞 탁자 위에 ‘탁’ 하고 내려놓았다. 탄창이 삽입되어 있었다. 겁을 주려는 수작임이 분명했다. 너무 긴장한 탓이었는지, 아니면 너무나 무기력하게 당해서였는지, 나는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써 자신의 권력 앞에 내가 겁을 먹기를 바라는 그 군인에게 예의상 겁을 먹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살짝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화가 나 있었다. 그는 아마 자기의 적군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야, 내가 너 여기서 이걸로 쏴 죽이고, 훈련 중 사고로 죽었다고 해도 아무도 몰라.”
그 무시무시하게 들려야 하는 말에도 나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나의 무반응에 약이 올랐는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잠깐 더 앉아 있더니 휑하니 나갔다.
잠시 후에 더 무서운 게 왔다. 교련 교수님이었다. 맘이 여린 교수님은 말씀을 세게도 못 하시고 나를 설득했다.
“야, 일단 반성문 쓰고 나가자. … 딴 애들은 다 C 줄 건데 너는 A 줄게.”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86학번에 유일한 A학점 때문이 아니라, 이미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만큼의 일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퇴소할 때까지 훈련에 잘 참여하겠다”는 내용으로 썼다. 교수님이 고마워하셨다. 지금도 그 교수님 얼굴이 생각난다. 참 고마운 분이었다.
딴 애들은 왜 다 C를 준다는 건지 의아했었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가 처참하게 잡혀가는 것을 본 다른 학생들은 즉시 집단 시위에 돌입했었단다. 스크럼을 짜고 연병장을 돌며 그야말로 강력한 추모식을 거행할 수 있었단다. 물론, 연행한 나를 즉시 석방하라는 요구도 하면서. 다른 학생들이 그렇게 나를 지켜 주었기 때문에 그들도 더 이상 나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학교로 돌아온 후, 선배들의 권유로 집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전방 부대에서 했던 내 행동 때문에 관악서 정보과 형사들이 내 뒤를 밟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남산이나 남영동에 잡혀 가서 실컷 고문당하고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선배들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은 지라 열심히 도망다녔다. 정말 전쟁 같은 나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과외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었다. 6월이 가까워질수록 거리에 나가야 하는 날은 점점 더 많아졌다.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배고픈 날이 더 많아졌다.
같이 사는 고등학교 친구의 과 선배 한 분을 알게 되었다. 내 친구에게 몹시 친절했다. 덕분에 나에게도 친절했다. 생활이 너무 힘들었던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선배에게 과외 자리 소개를 부탁했다. 서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안 지나 흔쾌히 소개해 주셨는데, 그게 보통 자리가 아니었다. 돈도 돈이었지만 나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추억을 남겨 준 자리였다.
과외집이 멀었다. 다행히 학교 앞에 서는 버스가 닿는 곳이었다. 그 노선 버스를 타고 신촌을 넘어 거의 종점까지 갔다. 이대 혹은 한양대 음대를 목표로 하고 있는 여학생이었다. 2살 차이니까 친구도 할 만한 사이인데 그 어머니는 나를 깎듯이 선생님으로 대하게 했다. 물론 학생의 부모님도 나를 그렇게 대했다.
얼마나 부잣집인지 전혀 감이 없었다. 사실 내 눈에 서울 사는 사람들은 다 부자였다. 알루미늄 섀시로 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루가 깔린 거실이 나왔다. 큰 밥상에 밥을 먹었다. 중학교 1학년짜리 남자애까지 4인 가족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와 달라고 하면서 월급은 40만 원을 주었다. 보통 20~30만 원이었는데 후한 금액이었다. 내 행색이 딱해 보여서였을까?
선금으로 주셨다. 첫 월급을 받던 날 친구들을 불러 실컷 먹었다. 그리고 남은 돈 중 10만 원은 같은 방 친구들에게 주고, 차비와 밥값으로 나머지는 남겨 놨다.
학생 어머니는 체구가 아담하고 소박하면서도 예쁜 아주머니였다. 어찌나 나를 깎듯이 대해 주시는지, 매번 몸 둘 바를 몰랐다. 왠지 모르지만 그 가족이 모두 나를 좋아하는 느낌을 받았다. 학생의 아버지와는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었지만, 나를 어렵게 대하지 않았다. 가는 날마다 항상 온 가족과 함께 밥을 먹었다. 미안해서 거절을 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냥 무조건 먹어야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맛있는 음식은 아주머니가 직접 손으로 빚어 만든 만두로 만든 물만두 요리였다. 만두의 배를 갈라 간장을 조금 넣어 먹으라고 알려주셨는데, 얼마나 맛있었던지 나는 지금도 물만두를 좋아한다.
나는 불성실한 과외 선생이었다. 데모가 있으면 연기하거나 마치고 부랴부랴 갔다. 연기를 해도, 늦게 가도 그분들은 항상 똑같았다. 내 옷에서 나는 최루탄 냄새 때문에 학생이 공부하기 힘든 날들도 있었다. 그래도 그분들은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항상 같은 옷만 입고 다녔다. 시장에서 산 베이지색 브이넥 반팔 셔츠였는데 촌스러운 옷이었다. 초여름인 데다 시도 때도 없이 그 옷만 입었으니 냄새도 났을 게다. 그래서 그랬을까?
어느 날 과외를 마치고 나오는데,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선물 봉투를 내미셨다. 부끄러운 듯이 옷 하나 샀다고 하시면서 입어 보라고 했다. 고마웠지만, 입어 본 적 없는 고급 브랜드의 옷을 입자니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부끄러워서 맘 편히 입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와 사이즈가 비슷한 친구에게 주었다. 나는 그 아주머니의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내 불성실에 눈살을 찌푸리기는커녕 그분들은 내게 더 큰 친절을 베풀어 주셨다. 중학교 1학년짜리가 수학을 못 따라간다면서, 일주일에 한 번만 숙제를 봐 달라는 거였다. 그리고 보수는 50만 원으로 올려 주셨다. 나에게는 고액 과외였다. 그 녀석은 완전히 내 팬이었다. 가서 밥을 먹고 그 녀석이 숙제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여간 졸리지 않았다. 내가 졸리는 것 같으면 그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
“형 주무세요. 제가 숙제 다 하고 깨워 드릴게요.”
그렇게 좋은 과외 자리도 끝이 오고 말았다. 6월이 다가오면서 나는 거의 매일 거리로 나가야 했다. 그날도 나는 데모를 하다가 허겁지겁 그 집으로 갔다. 너무 늦어서 미안한 마음에 경황이 없었다. 옷에서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물씬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아주머니께서 사방으로 손을 내저으며 어쩔 줄 몰라 하고 계셨다. 평소보다 유난히 반갑게 맞아주시는가 보다, 철모르는 짐작을 하며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섰다. 학생 방은 현관 바로 오른쪽이었다. 아주머니는 말을 하려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그저 다급하게 손사래만 치실 뿐이었다. '저렇게까지 한다고?' 의아했지만 아무런 낌새도 채지 못한 채, 나는 그저 아무렇지 않게 방문 고리를 돌렸다. 문을 연 그 찰나, 모든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지고 말았다.
“....”
“....”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여자애는 몸이 굳은 듯이 멈춰 섰고, 나는 너무나 당황해서 다시 문밖으로 나왔다. 아주머니가 낭패를 본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여자애는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다행히 윗도리와 팬티는 입은 상태였다. 막 바지를 입으려고 하던 찰나였는데, 내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당황해서 몸이 굳어져 버린 것이다.
그날 수업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너무도 수치스럽고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여자애와 어머니는 어땠을까? 나는 더 이상 학생과 아주머니를 볼 자신이 없었다.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무심히 밖을 바라보던 내 머릿속은 수없는 생각들로 가득했다. 처절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내게 어머니의 품속 같은 따뜻함을 느끼게 해 주던 가족들이었는데,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하지만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었다.
다음 날 전화를 해서 더 이상 할 수 없는 사정이 생겼다고 말씀드렸다. 아주머니는 어제 있었던 일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선불로 받은 돈을 돌려 드리겠다고 했는데 아주머니는 극구 받기를 거절하셨다. 사실 돌려 드릴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지만.
그 가족과 그렇게 갑작스레 이별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쉽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여자애가 나를 이성적으로 좋아했던 것 같다. 내가 대입 시험을 볼 때까지 계속했더라면 대학에 들어간 후에 친구로 만났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소개해 준 선배로부터 그 여자애는 한양대 음대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가족을 다시 만나보고 싶다. 그 시절 그렇게 불성실하던 나를 그렇게 사랑해 주신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그분들의 그런 조건 없는 사랑은 매일 전쟁같이 치열한 삶을 살던 내 마음속에 핀 한 송이 향기로운 꽃 같다.
따뜻한 위안을 주던 그 집 문을 영영 닫고 나오던 날, 나는 다시 철저히 혼자가 된 듯한 외로움을 느꼈다. 유일한 피난처가 사라진 나의 일상은 87년의 뜨거운 6월을 앞두고 더욱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같이 살던 방을 옮겼다. 학교도 더 가깝고 조금 더 넓고 깨끗한 방이었다. 하지만 훗날 민주화 대항쟁이라고 이름 붙여진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그해 6월이 다가올수록 나는 집에 들어갈 시간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처럼 시간이 나서 좀 쉬려고 집에 들렀다. 방과 부엌이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방 안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주인 아주머니가 오셔서 너무나 놀라운 말씀을 해 주셨다.
“학생 친구 어머니가 오셨었는데, 청소를 한참 하시고 난 후에 갑자기 쓰러지셔서 구급차 타고 좀 전에 다 병원에 갔어.”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청천벽력 같은 충격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슬픔과 분노가 해일처럼 밀려왔고, 내 영혼은 이토록 잔인하고 용서받지 못할 세상을 향해 피를 토하듯 쓰디쓴 애가를 불렀다. 그것은 1년 전 한 열사의 죽음을 목도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뼈아프고 참담한 순간이었다. 평범한 어머니의 그 갑작스럽고도 억울한 죽음이 우리가 목숨을 걸고 피 흘려 싸워야만 했던 진짜 이유임이 확실했다. 친구 어머니의 비통한 죽음이 제 영혼을 산산조각 내버린 만큼, 역설적으로 내 내면의 투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하고 매섭게 벼려졌다. 단 한 순간도 멈춰 서거나 쉬어서는 안 된다는 그 절박함이 내 뼈에 사무쳤다.
마지막으로 셋이 다 같이 방에 모였던 날이 생각났다. 주말이었는데 먹을 것은 떨어졌고 우리 셋은 배가 고팠다. 가장 어른스럽고 생활력이 강한 그 친구가 슈퍼에 가서 외상으로 라면을 두어 봉지 사 왔다. 우리는 라면을 끓여서 맛있게 먹었었다. 그게 학교 다니는 동안 그 친구들을 본 마지막이었다. 가슴에 피멍이 들었을 친구의 얼굴을 나는 도저히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럴수록 투쟁의 의지만 더 타올랐다.
87년 6월 군부 독재는 국민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처음 맞은 민주 진영은 분열하여 전두환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80년 군사 쿠데타의 2인자인 노태우에게 청와대를 빼앗겼다.
나는 허탈감과 패배주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학생운동 지도부도 우왕좌왕했다. 올림픽 반대투쟁을 해야 한다거나, 남북한 공동올림픽 쟁취 투쟁을 해야 한다거나, 혹은 학교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해야 한다거나, 뭘 해야 하는지 몰랐다. 한때는 목숨을 바쳐 민주화를 위해 싸웠지만, 분열한 민주 진영 정치세력이 피로 쟁취한 정권을 허망하게 군부 독재자의 입에 넣어 준 후에는 모든 것이 허무했다.
그 뜨거웠던 대학 시절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을 때 나는 삶의 목적을 잃고 헤매는 길 잃은 어린 양 같았다. 1990년 4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정상적인 학교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학원 진학 혹은 취업 준비에 분주한 친구들 사이에 내가 서 있을 곳은 없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것은 시작한 것을 중도에 포기하는 것 같아서 내키지 않았고, 다른 친구들처럼 대기업 일자리를 알아보기에는 아직도 민중들의 아픔이 선연히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재는 무너졌지만 가난한 이들의 삶은 변한 것이 없었고, 광장의 승리 뒤에 찾아온 허탈감은 컸다. 나는 엘리트들의 세상으로 편입하기보다, 여전히 소외되어 있는 이들의 가장 낮은 일상 속으로 들어가야만 다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 한 사람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로부터 영등포에 있는 야학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평소에 친하지 않았던 선배인지라 처음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점점 더 관심이 끌렸다. 다른 선배에게 물었더니 그 야학운동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던 한 선배를 소개해 주었다. 그 선배를 만난 후 나는 야학을 하기로 맘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