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을 이렇게 배웠다--제3장 아낌없이 주는 사랑
나는 사랑을 이렇게 배웠다
장민구 지음
제3장
아낌없이 주는 사랑
1990년 2월, 대학에 함께 입학했던 친구들이 영광스러운 서울대학교 대운동장 졸업식장으로 향할 때, 내 젊음의 방향을 돌려 마침내 내가 향한 곳은 영등포 어느 교회 곰팡이 냄새 나는 어두운 지하 한 구석에서 열린 야학 입학식이었다.
명목은 한문 교실이었다. 주변의 대기업 공장들 그리고 작은 사업장들로부터 학생들이 왔다. 여학생들은 대부분 20대 초반의 아가씨들이었고, 두어 명의 남학생들은 건장한 노동자 형님들이었다. 명목은 취미로 한문을 배우는 곳이었지만 대학생 노동운동 활동가들과 노동자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6개월의 과정을 통해서 노동자들은 한국 사회와 자신들의 처지 그리고 사업장의 민주화에 대한 의식이 싹터 갔다.
수습 강사였던 나는 특별히 가르치는 과목 없이 학생들과 어울렸다. 학생운동을 하던 학교와는 많이 달랐다. 학생들은 활동가들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나에게 많은 관심을 주었다. 특히 몇몇 여학생들은 나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관심이 싫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그런 순수하고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에 쉽게 매료되었다.
사실 나는 그 학생들보다 더 불우한 면이 많았다. 일단 돈이 없었다. 수입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공대 나온 사람이 왜 과외라도 하지 않았냐고 묻는 경우가 많은데, 내 생활 패턴이 과외에 맞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돈을 버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나중에 우유 배달을 하게 되었을 때 그런 일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게다가 나는 이미 사회로부터 많이 격리되어 있었다. 서울은 본래 낯선 타향인데다 가난한 고학생에게는 가혹한 곳이었다. 특히 나처럼 ‘정신 못 차리고 데모나 하는 사람’에게는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냥 나는 그런 분들 속에서 더 편안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대기업에 취직했을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얼마나 평균적인 사람들과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삶을 살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바뀐 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도 때때로 나는 여전히 그때 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렇게 사는 것이 나라는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당시 스물넷이던 나와 동갑인 아가씨들이 몇 있었다. 동갑끼리는 말을 놓고 친구처럼 지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그중 한 명이 동갑내기들끼리 소풍을 가자고 제안했다. 다들 근무 조건이 달라서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었지만 가까스로 어느 일요일을 택했다. 3교대로 돌아가는 회사에 다니는 한 친구가 아침 6시에 일을 마치고 잠을 자지 않고 바로 와야 했지만 괜찮다고 했다.
문제는 소풍 준비였다. 다들 3교대 혹은 주말에도 야간 작업 등이 있어서 준비를 할 시간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내가 해 보지 뭐” 하고 자청했다. 김밥만 적당한 양을 싸면 되었지만 나는 김밥을 한 번도 싸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내가 살던 자취방 옆 시장에서 사면 되었지만 살 돈도 없고 해서 재료만 사서 만들어 볼 참이었다.
그 주 토요일 오후에 시장에서 김밥 재료를 사서 김밥을 만들었다. 밥 양을 조절하지 못해서 김밥이 너무 두껍고 거의 대부분의 옆구리가 터졌다. 5-6인분이면 되는데, 한 10인분은 만들었다. 소풍 가서는 역시 먹는 게 최고 아닌가?
서울 대공원에 갔다. 우리 중에 가 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모두 어리둥절했다. 전철과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갔던 기억이 난다. 모두 신이 났다. 서울에 올라온 지 다들 몇 년씩 되었지만 한 사람도 그렇게 소풍을 가보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그랬지만.
공원에는 들어가지 않고 그 주변 잔디밭에 둘러앉아 노래도 몇 곡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출출해지자 다들 김밥을 먹자고 했다. 드디어 내가 만든 김밥이 빛을 볼 시간이었다. 찬합을 열었는데 터진 옆구리가 그나마도 더 벌어져서 김밥인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들 배가 고픈 터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다들 고마워했다.
해가 많이 남아 있었지만 뭐 거기서 더 놀 만한 것도 없어서 다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버스에는 손님들이 많지 않았다. 아가씨들은 신이 나서 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바로 앞자리에 짐들을 끌어안고 있었다. 한 10여 분이 지났을까? 나는 눈물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아가씨들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손님들이 많이 없어서 망정이었지, 정말 민망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노동에 지친 근로자들의 모습. 계속되는 고강도 노동으로 누적된 피로로 인해 몰려오는 잠을 피할 재간이 없었을 게다. 특히 새벽 일을 하고 한숨도 자지 않고 바로 온 친구는 그날따라 멋진 옷을 입고 왔었는데 완전히 곯아떨어진 모습이 마치 의식을 완전히 잃은 사람 같았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평생을 이런 사람들의 친구로 살겠다.’
그들의 곁에 평생 남겠다는 그날의 묵직한 다짐은 나를 단순한 야학 교사에서 더 깊고 위험한 헌신의 자리로 이끌었다. 야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선배 한 분이 노동운동 조직에 가입을 권유했다. 나와 동갑인 친구 하나, 그리고 2명의 공대 선배가 셀(Cell)이었다. 우리 셀은 야학을 통해서 형성된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조직화하고 이들을 통해 그들이 속한 노동 현장들을 민주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노동자 대중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노동자 대중 조직을 형성하기 위해 문화공간을 열었다. 전철 2호선 영등포구청역 이면 도로에 있는 한 건물 지하를 세내어서 방음시설을 하고 풍물 악기들과 기타 등을 구입했다. 초기에 풍물반과 노래반을 만들었는데, 기타를 조금 칠 줄 알던 나는 노래반을 맡았다.
조직에서 받은 내 비밀 임무는 주변에 있던 한 대기업 공장에 다니던 노동자 친구들에게 권리의식을 깨워 주고 활동가로서의 결단을 하는 친구들에게는 자신을 보호하며 활동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결국 그렇게 육성된 노동자 활동가들이 자신들의 현장에서 자신들의 동료들을 상대로 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태일 열사와 같이 스스로 자각하고 일어서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학생 출신 활동가들의 도움을 통해서 육성되는 경우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한 사람의 평범한 노동자가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세뇌되다시피한 패배주의와 두려움을 극복하고 활동가로 거듭나는 것은 선배 활동가들의 진정한 관심과 사랑밖에는 없었다.
우리 셀의 활동가들은 진정으로 노동자들을 사랑했다. 노동자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혹시라도 오류가 발견되면 조직의 정기 모임에서 어김없이 지적을 받고 자기비판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들 자신들도 활동가로서 성장해 나갔다. 학생운동 조직 활동에 이어 노동운동 조직 활동을 통해 나는 목숨을 거는 사랑을 배우고 실천했다.
문화공간 활동은 비밀 조직 활동을 커버하는 역할도 했다. 하지만 대중 활동인 문화공간 활동도 비밀 조직 활동 못지않게 중요했다. 두 가지는 상호 의존적이고 보완적이었다.
나는 노래반 활동을 좋아했다. 10여 명의 노동자들이 매일 와서 함께 기타와 노래를 배우고 함께 노래하고 함께 어울렸다. <임을 위한 행진곡>, <꽃다지> 등 주옥같은 노동가요 명곡들은 물론, <사랑과 우정 사이>, <내 사랑 내 곁에> 등 유행가도 신나게 불렀다. 고대 활동가 동생의 <내 사랑 내 곁에>는 단연 인기 최고였다.
모임이 끝나면 그 자리에서 뒤풀이를 했다. 밥을 안 먹은 사람은 밥도 먹고 술도 한 잔씩 했다. 노동 현장에서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며 우리는 혹은 친구로, 혹은 형제자매로 서로를 받아들이며 깊은 정을 쌓았다. 10시가 되기 전에 회장님은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다음 날 출근을 해야 하는 친구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였다.
그날도 뒤풀이를 하고 집에 가기 위해 다 같이 전철역으로 갔다. 영등포 구청역은 기차 철로를 사이에 두고 플랫폼이 양쪽으로 나뉘어 있는 역이었다. 개찰을 하고 당산역으로 가는 친구들은 나와 반대쪽으로 내려갔다. 이쪽에서 타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서 항상 우리는 기차가 올 때까지 각자의 플랫폼에 서서 얘기를 하곤 했었다.
신림동 쪽으로 가는 전철을 타는 플랫폼으로 연결된 계단을 거의 다 내려갔을 때, 기둥 뒤로 건장한 중년 남자 두어 명이 얼른 기둥 뒤로 숨는 게 보였다. 못 본 척하며 플랫폼을 둘러보니 비슷한 느낌의 중년 남성들 서너 명이 더 눈에 띄었다. 올 게 온 것이었다. 영등포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문화공간이 문을 연 후에 가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우리를 감시하는 듯했다.
그날은 마침 문화공간 활동가 회의가 있었던 날이어서 내 서류가방에는 회의 자료가 들어 있었다. 비밀 조직의 자료는 아니었지만 대중 활동과 관련된 자료라도 정보경찰의 손에 단 하나도 내어 줄 수 없었다. 물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붙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지를 발휘해서 가방도 보호하고 그들의 손아귀에서도 벗어나야 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반대편에서 전철을 기다리는 노래반 친구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장난을 치듯이 소리쳤다.
“야, 내 가방 받아 볼래?”
상대편에 있던 노래반 반장 친구가 맞받았다.
“오빠, 한 번 던져 봐.”
“진짜 던진다.”
내 쪽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가방을 순식간에 벗어서 힘껏 던졌다. 상대편에 있던 친구들이 가방을 받고 낄낄대며 웃었다.
“내일 가져올게. 잘 가. 오빠.”
반장의 소리는 이미 플랫폼에 들어오고 있는 전철 소리에 묻혔다. 전철이 들어오고 문이 열렸다. 전철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내린 후 얼른 나는 전철에 탔다. 들어가서 좌우를 살펴보니 아까 보았던 건장한 중년 사내들이 서둘러 전철에 타고 있었다. 바로 그때부터가 중요했다. 그들을 따돌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두어 명은 나와 같은 칸에 타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열차 출입문 닫습니다.”
방송이 나오고 문이 반쯤 닫혔을 때, 나는 몸을 옆으로 해서 얼른 밖으로 빠져나갔다. 나와 같은 칸에 탔던 자들이 거의 다 닫힌 문에 손을 넣고 열어 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정보과 형사들이 나를 체포하려고 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다행히도, 문을 열기에는 이미 늦었고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혹시 플랫폼에 남아 있는 형사가 있을 수도 있었고, 역 밖에서 대기하던 자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들어온 반대 방향 계단으로 뛰어 나가려고 하는데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손으로 난간을 잡고 몸을 끌듯이 계단을 올라, 나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개찰구를 조용히 빠져 나와 다시 밖으로 나가는 계단을 힘겹게 올라갔다. 금방이라도 누가 내 뒷덜미를 잡을 것 같아 숨이 막히는 듯했다.
겨우 밖으로 나온 후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며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탄 후 일단 홍제동으로 가자고 했다. 휴학한 과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홍제동에 산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 친구는 데모를 한 번도 하지 않았고, 더구나 휴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의 집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홍제동 어딘가에 내린 나는 그 친구에게 공중전화를 걸어 집으로 찾아갔다.
그런 상황에 대비해서 비상금은 필수였다. 조직에 비상을 걸었다. 모든 조직원들은 1시간 안에 모든 자료를 소각하고 다른 장소로 거처를 옮기게 되어 있었다. 물론 한 사람은 그날 밤에 바로 내 가방을 확보해서 피신했다.
홍제동 친구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무슨 일이냐고도 묻지 않았다. 그 시절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끔 그렇게 쫓기기도 한다는 것쯤은 그 친구도 알고 있었으리라. 평소에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다음 날까지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며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 친구가 왜 휴학을 했는지, 왜 그렇게 힘들어하고 있는지 등등 많은 얘기를 들었다. 그 친구는 내가 갑자기 그의 신세를 부탁한 이유에 대해서는 끝까지 묻지 않아 주었다. 그 친구는 서울 출신이라 과외를 끊이지 않고 했다. 그래서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풍족한 학생이었다. 조직의 비상이 해제되고 내가 은신할 곳이 정해졌을 때 그 친구와 헤어졌다. 그 친구는 내게 밥이라도 사 먹으라며 돈을 쥐어 주었다. 도피 자금이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몇 년 뒤 그 친구는 그때 괴로움을 주었던 여자친구와 결혼했다. 그야말로 내로라 하는 고관대작의 귀하고 아름다운 따님이었다. 나는 그 친구가 결혼식에 초대한 몇 안 되는 친구들 중 하나였다. 그날이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정말 고마운 친구다.
두어 주가 지난 후부터는 문화공간에 다시 출근했다. 일단 조직 활동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어느 날 문화공간 옆 슈퍼에 가는데 그때 보았던 형사가 다가왔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이미 모든 위험물들은 모두 제거했고 비밀 활동들도 재개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내 자신의 안위 외에 걱정할 것은 없었다.
“야, 너 잘 도망가더라.”
그 형사는 분하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나는 들은 체도 본 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써 그들이 나를 더 이상 쫓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숨어야 하는 정글 속 같은 시간들이었다. 부모 형제 자매를 위해 자신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를 짐승처럼 사냥하려던 독재 하수인들의 감시는 매일 아침 내 담요와 베개를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적시곤 했다. 그토록 살벌하고 메마른 세상 한가운데서, 역설적으로, 나는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따뜻한 사랑들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 내가 담당하던 공장에 다니는 아가씨 둘이 함께 문화공간을 찾아왔다. 노래반이나 풍물반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고, 오직 나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이성적인 관심이 아닌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나이도 비슷하고 내가 담당하는 공장 노동자이기에 우리는 금방 가까워졌다. 그들은 고등학교 때 독서클럽을 하면서 사회운동에 눈을 뜨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노동운동을 할 목적으로 내가 담당하던 공장에 들어가 벌써 3년 정도 활동을 해 오던 활동가들이었다.
밥도 자주 먹고 술도 자주 같이 마셨다. 항상 둘이 같이 만났는데 한 사람은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다른 한 사람은 성격이 활달했다. 그렇게 많이 친해졌던 어느 날 우리는 신림동에서 술을 마셨다. 아가씨들이 술에 많이 취했다. 조직의 보안을 엄격히 지켜야 했던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술을 마셔도 절제를 했다.
활달한 성격의 아가씨가 밖에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오자고 했다. 나는 취한 그 아가씨를 보호해 줄 겸 같이 나갔다. 주점 밖 벤치에 나란히 앉아 담배를 막 꺼내려고 하는데 그 아가씨가 갑자기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고 입을 맞추었다. 나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그녀는 취해서 정신이 없는 듯했다. 담배를 다 피우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불과 몇 분의 시간이었는데 정말 길게 느껴졌다.
며칠 뒤에 다시 연락이 와서 만났다. 웬일인지 나를 기습했던 그 아가씨는 보이지 않았다. 내성적이고 참한 성격의 그 아가씨는 그 친구가 활동을 그만두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날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등학교 독서클럽부터 함께해 온 동지이자 친구를 잃은 그 활동가가 너무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그녀와 또 하나의 소모임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나서 조직 활동에 필요한 공부도 하고 현장 활동에 대한 얘기도 나누었다. 그녀의 자취방을 학습 장소로 사용했는데, 모임을 하러 가면 꼭 나를 위한 밥상을 차려 놓았다. 하지만 한 번도 밥을 같이 먹은 적은 없다.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갈수록 기가 약해졌다. 그만둔 친구의 빈자리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좀처럼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그 공장의 상황이 그녀를 지치게 했었으리라. 많은 활동가들이 그랬다. 나는 노동운동 조직의 동지들도 있고 또 문화공간의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내가 유일한 소통의 대상이었지만, 내가 그녀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함께 모임을 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녀는 그래서 그렇게 나를 위한 따뜻한 밥상을 차려 놨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원한 것은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얘기를 나누는 소소한 일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둔한 나라도 그녀가 그런 것을 원했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걸 채워 줄 수는 없었다.
열악한 현장에서 오래 일한 사람일수록 그 굴레를 깨기가 힘들다는 것을 그 공장 노동자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 안에 있는 산업체 야간고등학교에서 학교를 다니거나 졸업한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학교에 보내 준다는 명목으로 임금은 최저 수준이었다. 임금이나 노동환경보다 더 큰 문제는 인권이었다.
한 번은 노래반원이던 그 공장 노동자 한 분이 잔뜩 슬픈 표정으로 술을 한 잔 하자고 했다. 술자리에서 나는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옥상에 직원 휴게소 같은 곳이 있는데, 그곳 쓰레기통에서 핏덩어리 신생아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조사를 해 보니 한 어린 여직원이 낳아 버린 아이였단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미성년의 어린아이가 임신을 하게 되었고 혼자서 복대를 하고 10달을 보낸 후에 화장실에서 출산을 해서 아이를 버렸다는 것이다.
너무도 안타까웠지만 정확히 파악할 방법도 없고, 설사 파악한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민주노조를 세우고 노동 현장을 민주화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을 삼키며 주먹을 다시 한 번 굳게 쥐는 것밖에는.
노동자들의 삶을 이해할 수록, 그들의 사랑에 빠져들 수록, 나는 이재호, 김세진, 이동수, 박종철, 그리고 전태일 열사가 어떻게 자신의 몸에 신나를 붓고 불을 붙일 수 있었는지를 점점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을 설레게 했던 “너희 몸은 이제 너희 것이 아니고 나라와 민족의 것”이라는 말이 점점 더 실감이 났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독재와 탐욕에 대한 적개심으로, 착한 노동자들의 억울함은 죽음의 두려움을 잊게 하는 우정으로 변했다. 어느덧 나는 대학생 친구가 아니라 또 한 사람의 전태일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시간은 무심하게도 흘러 어느덧 대학 졸업을 앞둔 1990년 가을이 되었다. 투쟁의 현장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던 내게, 국가 권력은 군 입대 신체검사 통지서라는 또 다른 족쇄를 채우려 했다.
대학 졸업을 서너 달 앞둔 1990년 10월 군 입대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통지가 왔다. 당시에 대졸자는 대부분 현역 징집 대상이었다. 현역 군복무를 하는 것은 나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내가 담당한 활동이 멈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대에서 무슨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 직선제가 되기는 했지만 아직 민주화가 되었다고 할 수 없었기에 활동가들은 여전히 목숨을 걸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무청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는데 정형외과 군의관 앞에 갔을 때였다. 내 파일을 보더니 대위인 그 군의관은 다짜고짜 내게 모욕적인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매국노 새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실컷 데모질만 하다가 군대는 안 가려고 하고. 너, 이 새끼, 데모하다가 군대 안 가려고 일부러 다리 다쳤지? 내가 다 알어, 새끼야. 너 같은 놈들의 속셈을.”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하면서 자기 화에 자기가 흥분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주변에 있던 검사를 받으러 온 젊은이들은 물론 다른 군의관들도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며, 모든 시선이 나 있는 쪽을 향했다. 수치스럽게도 그때 검사를 받느라고 수검자들은 모두 팬티만 입은 상태였다.
나는 그의 광기 어린 난동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목숨을 걸고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고함소리는 내겐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나의 그런 반응이 조롱으로 느껴졌는지, 그의 흥분과 광기와 막말은 점점 더 심해졌다. 눈이 벌겋게 충혈된 것이 그 전날 먹은 술이 깨지 않았던 것 같았다.
“무릎꿇어! 이 매국노 새끼야. 무릎 안 꿇어?”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그를 말리려고 안절부절하고 있는 동료 군의관에게 조용히 말했다.
“여기 책임자와 면담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잠시 후 나는 계급이 높은 군의관과 사무실에서 1대 1로 면담을 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쪽에서 제의를 했다.
“학생,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보니까 무릎에 철심이 있어서 보류 판정을 하고 나중에 철심을 뺀 후에 재검을 할 수도 있는데, 현재 상태로 5급 방위병 판정을 하겠습니다.”
다음 해에 나는 방위병으로 전라북도 부대에 입대했다. 전근 신청을 해서 수방사 소속 예비군 부대로 옮겼다. 그래서 나는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내 안전에 대한 염려도 해결되었다. 어느 날 대대장님이 사무실로 나를 부르셨다.
“너 별일 없지? 오늘 너를 찾는 사람들이 왔었다. 내가 잘 관리하겠다고 하고 돌려 보냈다. …. 나가 봐.”
나를 찾아온 사람들은 기무사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대대장님이 신원보증을 하고 돌려보낸 것이었다. 대대장님이 너무나 고마웠다. 대대장님은 내가 제대하는 날까지 단 한 번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진짜 어른다운 멋진 존경받을 만한 군인이셨다.
하지만 그 대대장님 같은 분은 예외적인 존재였다. 군의관의 핏발 선 눈동자에서 보았듯이, 세상의 주류들은 우리를 ‘매국노’라 부르며 노골적으로 혐오하고 조롱했다. 엘리트 사회의 궤도에서 이탈한 나를 품어줄 안락한 자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세상의 멸시가 차가울수록, 가장 낮은 곳에서 만난 가난한 민중들의 체온은 눈물겹도록 따뜻했다. 내 인생의 진짜 은인들은 바로 그 밑바닥에 있었다.
낮에는 군복을 입고, 밤에는 다시 문화공간으로 출근하는 이중 생활도 어느덧 끝이 났다. 군대에서 점심 식사를 할 수 있어서 당시에 고질적으로 갖고 있던 위장병도 고쳐졌다. 제대를 하니 다시 전업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다시 먹고 사는 게 문제가 되었다.
그때쯤에 노래반원 동생 하나가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형을 데리고 왔다. 승기 형이었다(가명). 그 동생은 신문 배달을 했고 그 형은 우유 배달을 하는 배달원들이었다. 그 형도 처음에는 신문 배달을 했었는데 성실하게 돈을 모아서 우유 배달을 시작했다. 우유 배달을 하려면 보증금도 내고 신문 배달부들의 합숙소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에 자취방 보증금도 있어야 하고 월세도 내야 했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침에 배달 일을 끝내고 공간에 와서 함께 얘기도 하면서 쉽게 가까워졌다. 그 동생도 승기 형도 음치였다. 노래반에 오기는 하지만 기타를 배울 생각도 노래를 부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 모임에 함께하는 것이 즐거웠다. 특히 예쁜 여자 동생들이 많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사회보다도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고 강조했던 노동자 운동단체였던지라 쉽사리 연애사건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노동자들이지만 누가 우유 배달부, 신문 배달부를 사귀고 싶어 했겠는가?
저녁 노래반이 끝나고 나서 2차 뒤풀이를 할 때면 시간이 너무 늦었다. 승기 형이 공간에서 500미터도 안 되는 곳 옥탑방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때 나는 가끔 승기 형 방에 신세를 졌다. 참으로 소박한 방이었다. 본래 방이 아니던 옥탑 창고를 방으로 만들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 화장실도 없고 부엌도 없었다. 겨우 세수를 할 수 있는 세면대만 있었던 것 같다. 거기서 잠을 잘 때면, 나는 가끔 마치 창고 한 구석에 장판을 깔고 잤다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승기 형은 새벽 3시 정도면 일어나 일을 나갔다가 아침 8시쯤에 돌아왔다. 나를 깨워서 밥을 먹으러 갔다. 신문 배달하는 동생과 셋이서 놀부 부대찌개 집에 자주 갔었다. 돈은 다 승기 형이 냈다. 신문 배달을 하는 동생보다 형편이 나았고, 노동운동을 전업으로 하는 나보다는 말할 수 없이 나았다. 얻어먹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나는 항상 염치가 없었다. 비록 무임으로 봉사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번 돈으로 사는 음식을 그냥 먹는 것은 영 맘 편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내 불편함을 눈치채서였을까? 어느 날 승기 형이 나를 다른 때와 다르게 식사에 초대했다. 어느 중국집이었는데 아주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었지만 승기 형이 많이 신경을 써서 고른 곳임에 분명했다. 신문 배달하는 동생까지 우리 셋은 거기서 음식을 먹고 얘기를 나누었다. 갑자기 승기 형이 잔뜩 긴장하더니 뭔가 준비한 얘기를 꺼냈다. 이미 상의를 했는지, 동생은 무슨 얘기인지를 아는 눈치였다. 하지만 무언가 못마땅해하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앉아 있었다. 마침내 승기 형은 조심스럽게 그 무거운 입을 떼었다.
“그런데, 민구 너 혹시 우유 배달해 볼래?”
“....”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 순간 한 방 맞은 것 같기도 해서 나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냥 승기 형과 동생을 번갈아 보기만 했다.
“그런데, 너도 돈이 있어야 하잖아. 너도 먹고 살아야 하잖아.”
승기 형은 내 자존심을 상하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내 걱정을 솔직히 내뱉었다.
“그렇긴 한데 …. 우유 배달을 하려면 보증금도 있어야 하고, 오토바이도 있어야 하잖아요.”
당시 우유 배달부 보증금이 보통 500만 원 정도였고 오토바이는 중고로 50만 원 정도였다. 우유 배달을 하고 말고를 떠나 나에게는 그것을 시작할 만한 ‘자본’이 없었다. 2년 뒤에 내가 대기업 기획실에 취직해 받은 월급이 세금을 제외하고 약 90여만 원이었으니까, 승기 형이 나를 위해 주신 돈은 약 6개월치 월급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보증금은 내가 보급소 사장님께 잘 말해 볼게. 오토바이는 내 것을 타면 돼. 어차피 나는 새것으로 바꾸려고 했었어.”
어색한 분위기를 의식한 듯 신문을 배달하는 동생이 우리 중 막내다운 말을 했다.
“형은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해 주면서 … 민구 형한테는 다 해 줘.”
다음 날 승기 형은 보급소 사장님과 얘기를 나눴다면서 나에게 보급소 사장님을 한 번 만나서 하겠다고 말만 하면 된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승기 형의 배달이 끝난 후에 승기 형의 오토바이를 타고 보급소에 갔다. 보급소 사장님은 인사를 하는 나를 보고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나의 첫 직업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부터 우유 배달을 하러 가 보니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보급소에 가서 사장님이 준비해 둔 우유 박스를 오토바이에 싣고 배달 구역으로 간다. 내 배달 구역은 15층짜리 아파트 단지였다. 더구나 아파트들은 복도식이 아니라 계단식이었다. 계단식은 우유 배달을 위해 만들어진 아파트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최고의 우유 배달 구역이었다. 일하기도 쉬웠지만 일하는 시간 대비 배달도 많아서 수입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수금도 수월했다. 당시만 해도 그런 아파트는 부촌이어서 그랬을 게다. 1년여 동안 배달을 하면서 수금으로 애를 먹은 경우는 한 번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것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 배달 구역이 본래는 승기 형이 하던 곳이었는데, 형은 옆 주택가로 구역을 옮기면서 나에게 그 구역을 물려준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수입이 90여만 원이나 되는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다. 모두 다 승기 형의 덕분이었다.
그때는 승기 형으로부터 내가 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알지 못했다. 그냥 고맙기만 했다. 서울공대 출신이 우유 배달부가 된 것이 무슨 문제나 되는 것처럼 내 주변에서도 내가 우유 배달을 하는 것을 그렇게 마뜩잖게 여겼던 것 같다. ‘그럴 거면 취직을 하지. 웬 우유 배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질 때가 적지 않았다. 여기서 잠깐 그 이유를 말하고 싶다.
나를 이유 없이 싫어하는 여자 선배들이 있었다. 어떤 여자 선배는 하다 하다 못해 내게 “너는 양키같이 생겨서 싫다”고 노골적으로 나를 싫어했다. 또 다른 여자 선배는 여성 회원들이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나를 싫어했다. 그 선배는 나를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무엇을 하는지를 몰랐기에 내가 우유 배달을 하는 것도 ‘왜 저런 수선을 떨지’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는 나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나를 변호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런 해명도 변명도 반박도 하지 않았다. 내 일에 몰두할 뿐이었다.
대중적 영역에서만 활동하는 사람들이 비공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다 이해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이 알게 되었다면 보안사고를 의미했다. 비공개 노동운동조직이 정보기관에 발각될 경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이나 무기징역도 가능한 시절이었다. 노동자들과 하는 소모임들, 현장 활동가와 하는 소모임, 그리고 나아가서 노동운동 조직의 셀 활동은, 후에 노동현장의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경찰과 정보기관이 눈을 부릅뜨고 찾던 국가보안법상 이적활동과 같은 것이었다.
승기 형이 내게 준 것은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사랑이었다. 나아가서, 자기보다 더 좋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희생적인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좋은 것을 주면서도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할까, 그토록 조심하는 지극한 사랑이었다.
몇 주 전에 승기 형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35년이 지나서야 승기 형이 내게 준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 더 깨달았다. 아내에게 승기 형에 대한 추억을 말하다가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그 보급소 사장님의 건성으로 나를 보는 태도가 그 생각을 하게 했고, 신문 배달하던 동생의 뭔가 못마땅해하던 그 모습이 더욱 확신을 주었다. 승기 형은 그 구역을 나에게 보증금째 통째로 넘겼던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구역에 대한 보증금을 새로 냈던 것이다. 보급소 사장이 금전적으로는 전혀 손해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그냥 건성으로 보기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신문을 배달하는 동생은 ‘나도 그 보증금만 있으면 신문 배달을 벗어나 우유 배달을 할 수 있는데…’ 하는 약간은 서운한 마음으로 나와 승기 형을 바라봤던 것이다.
그 뒤로 승기 형은 나에게 단 한 번도 우유 배달 구역을 넘겨준 것을 얘기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말을 꺼낼라 싶으면 그냥 자리를 피하거나 화제를 돌렸다. 승기 형은 그런 사람이었다. 비록 노동운동을 하지 않았고, 시위 현장에 나가서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지만, 어느 이름 없는 활동가를 그렇게 지원해 줌으로써, 그 거스를 수 없이 흐르던 민주화의 물결에 동참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지원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희생이었고 헌신이었다.
1년여가 되었을 때 나를 싫어하던 여자 선배 한 분이 선배 활동가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 활동가 부부의 신혼방에 초대받았던 그날 나는 “힘들어서 그만두려고 하던 참이었다”며 우유 배달 구역을 남자 선배에게 넘겼다. 오토바이도 함께. 비록 다시 굶기를 밥 먹듯이 해야 하는 과거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 활동가 신혼부부의 사정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나를 이유 없이 미워하던 사람의 신혼방에 그 황금 같은 구역과 오토바이를 기꺼이 내려놓고 나올 수 있었던 힘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옥탑방 창고에 살면서도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었던 승기 형의 사랑이 내 안에서 흘러넘친 결과였다. 그렇게 승기 형의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사랑은 내 삶을 거쳐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친구들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혼자 남아 백골단과 맞섰던 경주의 사랑, 52 킬로그램의 곧 쓰러질 것같던 가난한 고학생을 배불리 먹여 주신 식당 아주머니들의 사랑, 최루탄 냄새를 풍기던 불성실한 과외선생에게 매번 웃으시며 한상 거하게 차려주시던 이름 모를 아주머니의 사랑, 그리고 승기 형의 아낌없이 나누는 사랑이 나를 살게 했고, 나를 성장하게 했다.
돌아보면 매일 매 순간이 전쟁이었다. 정보과 형사들에게 쫓기고, 군의관에게 벌거벗겨진 채 모멸당하던 엄혹한 시대였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곳도 없고, 서러워도 서럽다고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그저 유유히 흐르는 역사의 강을 타고 가다가 언젠가 만나게 될 새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묵묵히 살아내야 하는 시절이었다.
그 시대와 세상의 벼랑 끝에 서 있던 나를 붙잡아 준 것은 거창한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었다. 자신의 전 재산이자 ‘안정된’ 밥줄을 남몰래 내어준 가난한 옥탑방의 한 우유 배달부의 바보 같은 사랑이었다. 세상은 짐승처럼 나를 물어뜯으려 했지만, 우리들의 가슴에 조용히 그러나 포기 없이 흐르던 뜨거운 피 같은 사랑은 우리들의 영혼을 소생케 해 주었다. 그런 민들레꽃같이 소박하지만 진정한 사랑들은 가장 가난하고 불우했던 그 시절 구석구석에 박혀 내 청춘을 가장 아름답고 찬란하게 영원히 빛내고 있다.
나는 사랑을 이렇게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