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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을 이렇게 배웠다

장민구 지음

 

 

제3장   아낌없이 주는 사랑

야학으로

1990년 2월, 함께 입학했던 친구들이 영광스러운 서울대학교 대운동장 졸업식장으로 향하고 있을 때, 내 젊음의 방향은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도착한 곳은 영등포 어느 교회, 곰팡이 냄새 나는 어두운 지하 한 구석에서 열린 야학 입학식이었다.

명목은 한문 교실이었다. 주변의 대기업 공장과 작은 사업장에서 학생들이 왔다. 여학생들은 대부분 20대 초반의 젊은 노동자들이었고, 남학생 두어 명은 건장한 노동자 형님들이었다. 겉으로는 취미로 한문을 배우는 곳이었지만, 실제로는 대학생 노동운동 활동가들과 노동자들이 만나는 자리였다. 6개월의 과정을 통해 노동자들은 한국 사회와 자신의 처지, 그리고 사업장의 민주화에 대한 의식을 조금씩 키워 갔다.

수습 강사였던 나는 특별히 맡은 과목 없이 학생들과 어울렸다. 학생운동을 하던 학교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학생들은 활동가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나에게 많은 관심을 주었다. 나는 학교에서 그런 순수하고 따뜻한 관심을 받아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쉽게 매료되었다.

사실 나는 그 학생들보다 더 불우한 면도 많았다. 일단 돈이 없었다. 수입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공대 나온 사람이 왜 과외라도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지만, 내 생활 패턴은 과외와 맞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돈을 버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훗날 우유 배달을 하게 되었을 때, 오히려 그런 일이 훨씬 마음 편했다.

서울은 내게 낯선 타향이었다. 가난한 고학생에게는 가혹한 도시였다. 특히 나처럼 ‘정신 못 차리고 데모나 하는 사람’에게는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냥 그런 사람들 속에서 더 편안했다.

나중에 대기업에 취직했을 때 비로소 알았다. 내가 얼마나 평균적인 사람들과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삶을 살았는지를. 그렇다고 내가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다. 지금도 때때로 나는 여전히 그때 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렇게 사는 것이 나라는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터진 김밥과 잠든 노동자들

당시 스물넷이던 나와 동갑인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몇 있었다. 동갑끼리는 말을 놓고 친구처럼 지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잡담을 나누는데, 그중 한 명이 동갑내기들끼리 소풍을 가자고 제안했다.

다들 근무 조건이 달라 시간을 맞추기 어려웠지만, 가까스로 어느 일요일을 골랐다. 3교대로 일하는 한 친구는 아침 6시에 일을 마치고 잠도 자지 못한 채 바로 와야 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했다.

문제는 소풍 준비였다. 다들 3교대나 주말 야간 작업 때문에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말했다.

“내가 해 보지 뭐.”

김밥만 적당히 싸면 되었지만, 나는 김밥을 한 번도 싸 본 적이 없었다. 사 먹을 돈도 없었다. 그래서 토요일 오후 시장에서 재료를 사다가 직접 만들었다. 밥 양을 조절하지 못해 김밥은 너무 두꺼웠고, 대부분 옆구리가 터졌다. 5~6인분이면 충분했는데 거의 10인분은 만든 것 같았다. 소풍은 역시 먹는 게 최고 아닌가.

서울대공원에 갔다. 우리 중 가 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 모두 어리둥절했다. 전철과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갔던 기억이 난다. 다들 신이 났다. 서울에 올라온 지 몇 년씩 되었지만, 그렇게 소풍을 가 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나도 그랬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주변 잔디밭에 둘러앉았다. 노래도 몇 곡 부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참 뒤 출출해지자 다들 김밥을 먹자고 했다. 드디어 내가 만든 김밥이 빛을 볼 시간이었다.

찬합을 열었는데, 터진 옆구리가 더 벌어져 김밥인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들 배가 고픈 터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고마워했다.

해가 아직 많이 남아 있었지만 더 놀 만한 것도 없어 다시 돌아오는 버스를 탔다. 버스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여성 노동자 친구들은 신이 나서 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바로 앞자리에 짐을 끌어안고 앉았다.

한 10여 분이 지났을까. 나는 눈물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친구들이 부끄러움도 모른 채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었다. 손님이 많지 않아 망정이지, 정말 민망할 만큼 깊은 잠이었다.

그것은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계속되는 고강도 노동으로 누적된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리라. 특히 새벽 일을 마치고 한숨도 자지 않은 채 온 친구는 그날따라 멋진 옷을 입고 왔는데, 완전히 의식을 잃은 사람처럼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평생을 이런 사람들의 친구로 살겠다.

그 짧은 문장은 내 안에 오래 남았다. 그들의 곁에 남겠다는 그날의 묵직한 다짐은 나를 단순한 야학 교사에서 더 깊고 위험한 헌신의 자리로 이끌었다.

문화공간, 노래와 형제자매

야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선배가 노동운동 조직에 가입하라고 권유했다. 나와 동갑인 친구 하나, 그리고 공대 선배 두 명이 한 셀이 되었다. 우리 셀의 목적은 야학을 통해 만난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조직화하여, 그들이 속한 노동 현장을 민주화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우리는 노동자 대중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문화공간을 열었다. 전철 2호선 영등포구청역 이면 도로의 한 건물 지하를 세내어 방음시설을 하고, 풍물 악기와 기타 등을 구입했다. 초기에는 풍물반과 노래반을 만들었다. 기타를 조금 칠 줄 알던 나는 노래반을 맡았다.

내 비밀 임무는 주변의 한 대기업 공장에 다니던 노동자 친구들에게 권리의식을 깨워 주고, 활동가로 결단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보호하며 활동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일이었다. 결국 그들이 자기 현장에서 동료들을 상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 사람의 평범한 노동자가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오랫동안 강요된 두려움과 체념을 넘어 활동가로 거듭나는 일은 선배 활동가들의 진정한 관심과 사랑 없이는 어려웠다.

우리 셀의 활동가들은 진정으로 노동자들을 사랑하려 했다.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오류가 발견되면 조직의 정기 모임에서 어김없이 지적을 받고 자기비판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들도 활동가로 성장해 갔다. 학생운동 조직 활동에 이어 노동운동 조직 활동을 통해 나는 보호하고, 기다리고, 위험을 함께 감수하는 사랑을 배워 갔다.

문화공간 활동은 비밀 조직 활동을 감추는 역할도 했지만, 그 자체로도 중요했다. 두 활동은 서로 의존하고 보완했다.

나는 노래반 활동을 좋아했다. 10여 명의 노동자들이 매일 와서 함께 기타와 노래를 배우고, 함께 노래하고, 함께 어울렸다. 『임을 위한 행진곡』, 『꽃다지』 같은 노동가요는 물론, 『사랑과 우정 사이』, 『내 사랑 내 곁에』 같은 유행가도 신나게 불렀다. 고대 활동가 동생이 부르던 『내 사랑 내 곁에』는 단연 인기 최고였다.

모임이 끝나면 그 자리에서 뒤풀이를 했다. 밥을 안 먹은 사람은 밥도 먹고 술도 한 잔씩 했다. 노동 현장에서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며 우리는 친구로, 형제자매로 서로를 받아들였다. 10시가 되기 전에는 회장님이 자리를 파하게 했다. 다음 날 출근해야 하는 친구들을 위한 따뜻한 배려였다.

영등포구청역의 도피

그날도 뒤풀이를 마치고 다 같이 전철역으로 갔다. 영등포구청역은 철로를 사이에 두고 플랫폼이 양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개찰을 하고 당산역 방향으로 가는 친구들은 나와 반대쪽으로 내려갔다. 내 쪽에서 타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우리는 늘 각자의 플랫폼에 서서 기차가 올 때까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신림동 쪽으로 가는 플랫폼 계단을 거의 다 내려갔을 때였다. 기둥 뒤의 건장한 중년 남자 두어 명이 얼른 몸을 숨기는 것이 보였다. 못 본 척하며 플랫폼을 둘러보았다. 비슷한 느낌의 중년 남성들 서너 명이 더 눈에 띄었다.

올 것이 온 것이었다.

영등포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문화공간이 문을 연 뒤 가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우리를 감시하곤 했다.

그날은 마침 문화공간 활동가 회의가 있었던 날이었다. 내 서류가방에는 회의 자료가 들어 있었다. 비밀 조직 자료는 아니었지만, 대중 활동과 관련된 자료라도 정보경찰의 손에 넘길 수는 없었다.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붙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반대편 플랫폼에서 전철을 기다리는 노래반 친구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장난치듯이 소리쳤다.

“야, 내 가방 받아 볼래?”

반대편에 있던 노래반 반장 친구가 맞받았다.

“오빠, 한 번 던져 봐.”

“진짜 던진다.”

내 쪽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방을 순식간에 벗어 힘껏 던졌다. 반대편 친구들이 가방을 받고 낄낄대며 웃었다.

“내일 가져올게. 잘 가, 오빠.”

반장의 목소리는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전철 소리에 묻혔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렸다. 나는 얼른 전철에 탔다. 좌우를 살펴보니 아까 보았던 건장한 중년 사내들이 서둘러 전철에 타고 있었다. 두어 명은 나와 같은 칸에 타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열차 출입문 닫습니다.”

방송이 나오고 문이 반쯤 닫혔을 때, 나는 몸을 옆으로 틀어 얼른 밖으로 빠져나갔다. 같은 칸에 탔던 자들이 거의 다 닫힌 문에 손을 넣고 열어 보려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이미 늦었다. 열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플랫폼에 남아 있는 형사가 있을지도 몰랐다. 역 밖에서 대기하는 자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들어왔던 반대 방향 계단으로 뛰어 올라가려는데,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손으로 난간을 잡고 몸을 끌듯 계단을 올랐다. 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개찰구를 조용히 빠져나왔다. 금방이라도 누가 뒷덜미를 잡을 것 같아 숨이 막혔다.

겨우 밖으로 나온 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택시를 잡았다. 일단 홍제동으로 가자고 했다. 휴학한 과 친구 하나가 홍제동에 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데모를 한 번도 하지 않았고, 더구나 휴학 중이었기 때문에 그의 집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홍제동 어딘가에 내려 공중전화로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날 밤 조직 전체가 숨을 죽였다. 자료들은 소각되었고, 사람들은 거처를 옮겼다. 한 사람은 그날 밤 바로 내 가방을 확보해 피신했다.

묻지 않아 준 홍제동 친구

홍제동 친구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 시절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끔 그렇게 쫓기기도 한다는 것쯤은 그 친구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평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 밤부터 다음 날까지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졌다. 그 친구가 왜 휴학을 했는지, 왜 그렇게 힘들어하고 있는지 들었다. 그는 내가 갑자기 신세를 부탁한 이유에 대해서는 끝까지 묻지 않아 주었다.

그 친구는 서울 출신이라 과외를 끊이지 않고 했다.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풍족한 학생이었다. 조직의 비상이 해제되고 내가 은신할 곳이 정해졌을 때, 우리는 헤어졌다. 그 친구는 밥이라도 사 먹으라며 돈을 쥐여 주었다. 도피 자금이라 거절할 수 없었다.

몇 년 뒤 그 친구는 당시 그에게 괴로움을 주었던 여자친구와 결혼했다. 나는 그가 결혼식에 초대한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였다. 그날이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그는 묻지 않아 주었다. 숨겨 주었다. 그리고 떠나는 내 손에 밥값을 쥐여 주었다. 참 고마운 친구다.

두어 주 뒤부터는 문화공간에 다시 출근했다. 아직 조직 활동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어느 날 문화공간 옆 슈퍼에 가는데, 그때 보았던 형사가 다가왔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이미 위험한 자료들은 모두 제거했고 비밀 활동도 재개하기 전이었다. 걱정할 것은 내 안위뿐이었다.

“야, 너 잘 도망가더라.”

그 형사는 분하다는 듯 말했다. 나는 들은 체도 본 체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나를 쫓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숨어야 하는 정글 같은 시간들이었다.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던 권력의 감시는 매일 아침 내 담요와 베개를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만들곤 했다. 그토록 살벌하고 메마른 세상 한가운데서, 역설적으로 나는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따뜻한 사랑들을 받고 있었다.

따뜻한 밥상과 이름 없는 절망

어느 날 내가 담당하던 공장에 다니는 젊은 여성 노동자 둘이 함께 문화공간을 찾아왔다. 노래반이나 풍물반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직 나에게만 관심을 보였다. 이성적인 관심이 아닌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나이도 비슷했고 내가 담당하던 공장 노동자들이었기에 우리는 금방 가까워졌다.

그들은 고등학교 때 독서클럽을 하며 사회운동에 눈을 떴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노동운동을 할 목적으로 내가 담당하던 공장에 들어가 벌써 3년 정도 활동해 온 활동가들이었다.

밥도 자주 먹고 술도 자주 마셨다. 항상 둘이 함께 만났다. 한 사람은 조용하고 내성적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활달했다.

많이 가까워졌던 어느 날, 우리는 신림동에서 술을 마셨다. 두 친구는 술에 많이 취했다. 조직의 보안을 지켜야 했던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했기에 술을 마셔도 절제했다.

활달한 친구가 밖에 나가 담배 한 대 피우고 오자고 했다. 취한 그를 보호해 줄 겸 같이 나갔다. 주점 밖 벤치에 나란히 앉았을 때, 그 친구가 취기 속에서 갑자기 내게 기대 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었다. 그가 많이 외롭고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 외로움을 그런 방식으로 받아 줄 수는 없었다.

불과 몇 분의 시간이었는데 아주 길게 느껴졌다. 담배를 다 피운 뒤 우리는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며칠 뒤 다시 연락이 와서 만났다. 그날은 활달한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내성적이고 참한 성격의 친구가 그가 활동을 그만두었다고 말해 주었다. 고등학교 독서클럽부터 함께해 온 동지이자 친구를 잃은 그 활동가가 너무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그와 또 하나의 소모임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나 조직 활동에 필요한 공부를 하고 현장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자취방을 학습 장소로 사용했는데, 모임을 하러 가면 꼭 나를 위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함께 밥을 먹은 적은 없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갈수록 기가 약해졌다. 그만둔 친구의 빈자리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공장의 상황이 그를 지치게 했을 것이다. 나는 노동운동 조직의 동지들도 있고 문화공간의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내가 유일한 소통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함께 모임을 하는 것뿐이었다.

그는 그래서 그렇게 나를 위한 따뜻한 밥상을 차려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가 원한 것은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소한 일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둔한 나라도 그 마음을 전혀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채워 줄 수 없었다.

그 공장 노동자들을 통해 나는 열악한 현장에서 오래 일한 사람일수록 그 굴레를 깨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 안의 산업체 야간고등학교를 다니거나 졸업한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학교에 보내 준다는 명목으로 임금은 최저 수준이었다. 그러나 임금과 노동환경보다 더 큰 문제는 인권이었다.

한 번은 노래반원이던 그 공장 노동자 한 분이 잔뜩 슬픈 표정으로 술을 한 잔 하자고 했다. 술자리에서 나는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들었다. 공장 안에서 한 어린 여성 노동자가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겪었고, 결국 한 생명이 이름도 없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그 아이와 그 어린 산모의 절망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확히 파악할 방법도 없었고, 설사 파악한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민주노조를 세우고 노동 현장을 민주화할 때까지는 눈물을 삼키며 주먹을 다시 한 번 굳게 쥐는 것밖에는.

노동자들의 삶을 알수록, 그들의 사랑에 깊이 들어갈수록, 나는 이재호, 김세진, 이동수, 박종철, 그리고 전태일 열사들이 어떤 절망과 분노 속에서 그 길로 밀려갔는지 조금은 짐작하게 되었다.

마음을 설레게 했던 ‘너희 몸은 이제 너희 것이 아니고 나라와 민족의 것’이라는 말이 점점 더 실감 났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독재와 탐욕에 대한 적개심으로 바뀌었고, 착한 노동자들의 억울함은 죽음의 두려움을 잊게 하는 우정으로 변했다.

어느덧 나는 전태일 열사가 아쉬워 하던 대학생 친구같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매국노라 불린 날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 군 입대 신체검사를 받을 때가 되었다. 투쟁의 현장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던 내게, 국가 권력은 병역의 의무라는 또 다른 족쇄를 채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1990년 10월경, 군 입대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통지서가 왔다. 본래대로라면 이듬해 2월에 졸업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나와 같은 학번 친구들이 대거 통지서를 받았다.

당시 대졸자는 대부분 현역 징집 대상이었다. 현역 군 복무는 나에게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나는 내가 담당하던 활동이 멈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대 안에서 무슨 일을 당할 수도 있는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아직 민주화가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는 때였다. 활동가들은 여전히 목숨을 걸고 살았다.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다가 정형외과 군의관 앞에 섰을 때였다. 내 파일을 본 대위 군의관이 다짜고짜 모욕적인 말을 하기 시작했다.

“매국노 새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실컷 데모질만 하다가 군대는 안 가려고 하고. 너, 이 새끼, 데모하다가 군대 안 가려고 일부러 다리 다쳤지? 내가 다 알어, 새끼야. 너 같은 놈들의 속셈을.”

그는 자기 말에 자기 스스로 흥분한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주변에 있던 수검자들은 물론 다른 군의관들의 시선도 모두 내 쪽으로 향했다. 팬티만 입고 신체검사를 받던 상황에서, 옷을 다 입은 사람에게 그런 모욕을 당하는 것은 여간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광기 어린 난동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늘 목숨을 걸고 산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어서 그런 고함소리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내 반응이 조롱으로 느껴졌는지, 그의 흥분과 막말은 점점 더 심해졌다.

“무릎 꿇어! 이 매국노 새끼야. 무릎 안 꿇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그를 말리려고 안절부절못하던 동료 군의관에게 조용히 말했다.

“여기 책임자와 면담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잠시 후 나는 계급이 높은 군의관과 사무실에서 1대 1로 면담을 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쪽에서 먼저 제의했다.

“학생,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보니까 무릎에 철심이 있어서 오늘은 보류 판정을 하고 1년 후에 재검을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현재 상태로 5급 판정을 내리겠습니다.”

그 일 덕분에 다음 해 나는 현역병이 아닌 보충역이 되었다. 고향에 있는 부대에 입대했다. 사령부 전산과에 근무하던 선배와 친구의 도움을 받아 수도권 지역 예비군 부대로 옮길 수 있었다. 서울로 주거를 옮긴 뒤 나는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역설적 보호자, 부대장

군 복무 기간 중 내 안\전에 대한 염려는 역설적으로 부대장님의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어느 날 대대장님이 사무실로 나를 불렀다.

“너 별일 없지? … 오늘 너를 찾는 사람들이 왔었다. … 내가 책임지고 잘 관리하겠다고 말해서 돌려보냈다.”

나를 찾아온 사람들은 기무사 사람들이었다. 대대장님은 그들에게 내가 부대 안에서 잘 관리되고 있다고 강하게 보증해 돌려보낸 것이었다. 너무나 고마웠다. 대대장님은 내가 제대하는 날까지 단 한 번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진짜 어른다운, 존경받을 만한 군인이었다.

물론 그 대대장님 같은 분은 예외적인 존재였다. 군의관의 핏발 선 눈동자에서 보았듯, 그 시대의 권력과 그 주변에 선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은 우리를 ‘매국노’라 부르며 혐오하고 조롱했다. 엘리트 사회의 궤도에서 이탈한 나를 품어 줄 안락한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세상의 멸시가 차가울수록, 가장 낮은 곳에서 만난 가난한 민중들의 체온은 눈물겹도록 따뜻했다. 내 인생의 진짜 은인들은 바로 그 밑바닥에 있었다.

옥탑방의 우유 배달부

낮에는 군복을 입고, 밤에는 다시 문화공간으로 출근하는 이중 생활도 어느덧 끝났다. 군대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어 고질적으로 갖고 있던 위장병도 좋아졌다. 제대 후에는 다시 전업적으로 활동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가 다시 닥쳤다.

그 즈음 노래반원 동생 하나가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을 데리고 왔다. 승기 형이었다. 그 동생은 신문 배달을 했고, 승기 형은 우유 배달을 했다. 승기 형도 처음에는 신문 배달을 했는데, 성실하게 돈을 모아 우유 배달을 시작했다고 했다.

우유 배달을 하려면 보증금도 내야 하고, 합숙소에서 나와 따로 방을 얻어야 했다. 매달 월세도 내야 했다. 신문 배달부가 우유 배달부가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승진이었다.

아침 배달을 마친 뒤 그들은 문화공간에 와서 함께 이야기하고 놀았다. 그렇게 쉽게 가까워졌다. 그 동생도 승기 형도 음치였다. 노래반에 오기는 했지만 기타를 배울 생각도, 노래를 부를 생각도 별로 없었다. 그냥 그 모임에 함께하는 것이 즐거웠던 것 같다.

저녁 노래반이 끝나고 2차 뒤풀이를 할 때면 시간이 늦었다. 승기 형은 문화공간에서 500미터도 안 되는 곳의 옥탑방에 살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 방에 신세를 졌다.

참 소박한 방이었다. 화장실도 없고 부엌도 없었다. 세수를 겨우 할 수 있는 세면대 하나가 전부였다. 거기서 잠을 잘 때면, 나는 창고 한구석에 장판을 깔고 자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승기 형 방에서 잔 날에는, 형이 아침 8시쯤 배달을 마치고 돌아와 나를 깨웠다. 그리고 함께 밥을 먹으러 갔다. 신문 배달하는 동생과 셋이서 놀부 부대찌개 집에 자주 갔다. 돈은 대부분 승기 형이 냈다. 신문 배달하는 동생보다도 형편이 나았고, 노동운동을 전업으로 하는 나보다는 말할 수 없이 나았다.

하지만 얻어먹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나는 늘 염치가 없었다. 비록 무임으로 봉사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번 돈으로 사는 음식을 그냥 먹는 것은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아낌없이 넘겨준 구역

그런 내 불편함을 눈치챘던 것일까. 어느 날 승기 형이 나를 평소와 다르게 식사에 초대했다. 어느 중국집이었다. 고급스러운 곳은 아니었지만 우리에게는 충분히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승기 형이 특별히 신경 써서 고른 곳임이 분명했다. 신문 배달하는 동생까지 우리 셋이 자리에 앉았다.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승기 형이 잔뜩 긴장하더니 준비해 온 듯한 말을 꺼냈다. 이미 상의를 했는지 동생은 무슨 이야기인지 아는 눈치였다. 그러나 뭔가 못마땅해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승기 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른데, 민구 너 혹시 우유 배달해 볼래?”

겸연쩍은 듯이 ‘그른데’로 말을 시작하는 것은 승기 형의 말버릇이었다.

너무 갑작스럽기도 했고, 순간 한 방 맞은 것 같기도 해서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승기 형과 동생을 번갈아 보았다.

“그른데, 너도 돈이 있어야 하잖아. 너도 먹고 살아야 하잖아.”

승기 형은 내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내 걱정을 솔직히 내놓았다.

“그렇긴 한데 …. 우유 배달을 하려면 보증금도 있어야 하고, 오토바이도 있어야 하잖아요.”

당시 우유 배달부 보증금은 보통 500만 원 정도였고, 오토바이는 중고로도 50만 원쯤 했다. 훗날 내가 취직한 대기업에서 받은 월급의 여섯 달 치에 가까운 돈이었다. 나에게는 그런 일을 시작할 자본이 전혀 없었다.

“보증금은 내가 보급소 사장님께 이미 말을 해 놨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러카고, 오토바이는 내 것을 타면 돼. 그렇지 않아도 나는 어차피 새것으로 바꾸려고 했었어.”

신문 배달하는 동생이 연신 입을 삐죽거리며 한마디 했다.

“형은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해 주면서 … 민구 형한테만 다 해 줘.”

그다음 날 아침, 승기 형의 배달이 끝난 뒤 나는 형의 오토바이를 타고 보급소에 갔다. 승기 형은 사장님에게 나를 인사시켰다. 나는 보증금을 면제해 준 점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보급소 사장님은 생색을 내기는커녕, 하던 일을 멈추지도 않고 나를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새벽 우유 배달부. 내 생애 첫 직업이 생겼다.

우유 배달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보급소로 가면 사장님이 준비해 둔 우유 박스가 있었다. 그것을 오토바이에 싣고 배달 구역으로 갔다. 내 구역은 15층짜리 아파트 단지였다. 게다가 계단식이었다. 계단식 아파트는 우유 배달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복도를 뛰어다닐 필요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배달이 있는 층들의 번호를 누른 뒤, 문이 열리면 투입구에 잽싸게 우유를 넣고 다시 엘리베이터로 돌아오면 끝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곳은 우유 배달 구역 중에서도 최상급이었다. 일하기 쉽고, 시간 대비 배달량도 많았다. 당시 그런 아파트 단지는 부촌이어서 수금도 수월했다.

나에게 그 좋은 구역을 넘겨주고, 승기 형은 주택 지역의 새 구역을 받았다. 주택 지역은 가장 어려운 구역이다. 집집마다 오토바이를 옮겨 가며 배달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안정적인 수입이 생기자 내 삶의 질은 단번에 몇 계단 올라갔다. 다 승기 형이 준 것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그때 나는 승기 형이 내게 준 것이 무엇인지 다 알지 못했다.

주변에는 내가 우유 배달을 하는 것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울대나 나온 사람이 웬 우유 배달이냐는 것이었을 게다. 그러나 우유 배달은 전업적인 활동을 하던 내게는 최적의 일이었다.

승기 형은 자기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내게 주었다. 그 좋은 것을 양보하면서도 내 자존심이 상할까 봐 그토록 조심했었다.

서른다섯 해 뒤에야 깨달은 사랑

몇 주 전, 승기 형에 대해 생각하다가 나는 35년이 지나서야 승기 형이 내게 준 것이 무엇인지 조금 더 깨달았다. 아내에게 승기 형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하다가 문득 떠올랐다. 보급소 사장님이 생색 한마디 내지 않고 나를 건성으로만 봤던 이유와 신문 배달하던 동생이 못마땅해하던 이유가 퍼즐처럼 맞춰지는 것 같았다.

승기 형은 그 구역을 보증금째로 내게 넘겼던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구역에 대한 보증금은 자신이 새로 냈던 것이다. 금전적으로 전혀 손해를 보지 않은 보급소 사장은 나에게 어떤 생색도 내지 않았고, 그래서 건성으로 보기만 했던 것이다. 신문 배달을 하던 동생은 ‘나도 그 보증금만 있으면 신문 배달을 벗어나 우유 배달을 할 수 있는데…’ 하는 서운한 마음으로 나와 승기 형을 바라봤던 것이다.

그 뒤로 승기 형은 내게 단 한 번도 우유 배달 구역을 넘겨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누가 그 이야기를 꺼내려 하면 자리를 피하거나 화제를 돌렸다. 승기 형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준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 빚으로 남기지도 않았다. 감사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비록 그는 노동운동을 하지 않았고, 시위 현장에 나가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지도 않았지만, 나같이 이름 없는 활동가를 그렇게 소리 없이 지원해 주었다. 그렇게 그는 거스를 수 없이 흐르던 민주화의 물결에 동참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지원이 아니었다.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희생이었고 헌신이었다.

사랑은 흘러간다

1년여가 지났을 때, 여성 선배 활동가 한 분이 문화공간의 활동가와 결혼하게 되었다. 서울대 2년 선배였던 그 여성 활동가는 나를 못마땅해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양키’같이 생겨서 그렇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활동가 부부의 집들이 날, 우리는 그들의 사정을 듣게 되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경제적으로도 어려웠지만, 또 다른 어려움도 있었다. 그 어려움을 들으며 피운 담배들로 그 좁은 방이 연기로 뿌옇게 가득 찼던 게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이로는 활동가들 중 막내였던 나는 그 무게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 듯 농담처럼 말했다.

“형 그럼 우유 배달 해 보실래요? 그렇지 않아도 나는 이제 힘들어서 그만두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할 만해요.”

다음 날 승기 형이 내게 했듯이 똑같이 우유 배달 구역을 남자 활동가에게 넘겼다. 비록 낡긴 했지만 오토바이도 함께.

다시 굶기를 밥 먹듯 해야 하는 과거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 활동가 신혼부부의 사정을 듣고 모른 체할 수 없었다. 나를 양키 닮았다며 이유 없이 미워하던 사람의 신혼방에, 황금 같던 배달 구역과 오토바이를 기꺼이 내려놓고 나올 수 있었던 힘은 사실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힘은 먼저 그것들을 기꺼이 내어 준 승기 형에게서 흘러온 것이었다. 사랑은 그렇게 가르침보다 전염처럼 흘렀다. 승기 형의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사랑이 내 삶을 거쳐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흐른 것이다.

나는 사랑을 이렇게 배웠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친구들의 뒤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혼자 남아 백골단과 맞섰던 경주의 사랑이 있었다. 52킬로그램의 곧 쓰러질 것 같던 가난한 고학생을 배불리 먹여 주신 식당 아주머니들의 사랑이 있었다. 최루탄 냄새를 풍기던 불성실한 과외 선생에게 매번 웃으시며 밥을 차려 주시던 이름 모를 아주머니의 사랑도 있었다.

그리고 승기 형의 아낌없이 나누는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들이 나에게 생명이 되었고,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돌아보면 그때 매일 매 순간이 전쟁이었다. 정보과 형사들에게 쫓기기도 하고, 군의관에게 벌거벗겨진 채 모멸당하던 엄혹한 시대였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곳이 없고, 서러워도 서럽다고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그저 유유히 흐르는 역사의 강을 타고 가다가 언젠가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혹은 끝내 만나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르는 새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묵묵히 살아내야 하는 시절이었다.

그 시대와 세상의 벼랑 위를 달리던 나를 붙잡아 준 것은, 자신의 전 재산이자 안정된 밥줄을 남몰래 내어 준 옥탑방의 가난한 우유 배달부의 아낌없는 사랑이었다.

세상은 거칠게 나를 넘어뜨렸지만, 내 가슴에 조용히, 그러나 포기 없이 흐르던 피같이 생명력 있는 사랑이 나를 끊임없이 일으켜 세워 주었다.

내 가난하고 불우했던 그 시절의 구석구석에는 민들레꽃 같은 사랑들이 피었다. 작고 소박했지만, 그 사랑들은 지금도 내 영혼을 그윽한 향기로 조용히 채우고 있다.

 

나는 이렇게 사랑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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